혁명군처럼 급습해온 꽃샘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꽃나무들은 언 땅에 맨발로 서서 가지마다 맺힌 꽃눈을 틔우느라 안간힘을 쓰는데, 외투를 다시 꺼내 입고 나온 사람들만이 어깨를 움츠리고 입김을 호호 불며 꽃샘추위가 매섭다고 호들갑을 떨던 지난 주. 화요일 저녁 퇴근길에 이라크에서 날아온 소년을 만났습니다.
그날, 데레사소비센터 앞에서 버스를 내려 슈퍼 앞을 급하게 지나 집 앞 골목으로 접어들다가, 고려당제과 진열장을 기웃거리던 소년과 딱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니, 너는, 네가 여길 어떻게?"
나는 그 소년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며칠 전 TV에서 본 소년임을. 저녁 9시 뉴스에선가, 바그다드 외곽을 지나는 도로변에서 일어난 폭탄테러 사건, 그 처참한 사건 현장을 쏟아내던 TV 화면에서 막막한 사막과 치솟는 검은 연기를 배경으로 서 있던 그 소년. 부모의 주검 앞에서 울고 섰던, 바로 그 소년이 틀림없었습니다.
소년은, TV에 비치던 모습 그대로 소매가 짧은 초록색 낡은 티셔츠와 얼룩진 반바지 밖으로 긴 목과 배꼽과 가는 팔다리와 맨발을 다 드러낸 채 오들오들 떨었습니다. 나는 얼른 외투를 벗어 소년의 언 몸뚱이를 감싼 뒤 슈퍼 건너 또와분식집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소년은 송아지 눈을 꿈뻑이며 김밥 2인분과 어묵 한 그릇을 순식간에 먹어치웠습니다.
압둘 살람 지아프. 대구에 온지 일주일째라고 했습니다. 밤마다 범어네거리 지하도에서 신문을 덮고 잤다고 했습니다. 사막을 아무리 뒤져도 없던 먹거리가 여긴 쓰레기통에도 많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막의 모래 바람이 그립다고 했습니다. 별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고 했습니다. 자기네 나라에는 밤낮 없이 포탄이 떨어지고 온 땅의 옆구리가 파이고, 모래 바람이 일어도 포성만 멎으면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초롱초롱하게 뜬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별들의 잔치를 못 보니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누군가의 눈빛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지만, 오늘 밤 돌아가려고 해요. 북두칠성에게 길을 물어 아버지가 묻혀 있고, 어머니가 묻혀 있고, 여동생이 묻혀 있는 사막으로 돌아가 배고프며 살 거예요. 밤마다 철철철 쏟아지는 별을 숨쉬며 살 거예요."
꽃샘추위가 물러갈 때까지라도 우리 집에 머물다 떠나라고 간곡히 달랬지만, '사는 일이 칼날처럼 시퍼렇게 추운 일인데 꽃샘추위야 사치지요'라며, 걸치고 있던 외투까지 기어코 벗어 건네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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