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지역에서 볼때 전북 지역은 접근성이 가장 떨어지는 곳이다. 88고속도로를 탈 때는 광주를 거쳐야 하고 경부고속도로로 갈 때는 대전을 경유해야 한다. 빼어난 관광지가 없고 인적 교류조차 활발하지 않은 것도 또다른 원인일 것이다.
전북 지역은 자연환경과 생활조건에선 경상도 지역과는 좀 다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야, 낮은 구릉, 평화롭고 한가로운 농촌마을... 경북에서 지겹도록 산과 접하다 확 트인 평야를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후련해진다.
전주→김제→익산→군산을 오가면서 지난 세기의 흔적들을 적잖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저 지나간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가슴 아픈 것들이 많았다. 오직 우리의 쌀을 뺏아가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시설과 건물들이었다. 그위에 일본인들은 성(城)과 같은 거대한 집을 지어놓고 호사를 누렸다.
▶곳곳에 널려있는 수탈의 흔적="10년전만 해도 군산은 한집 건너 일본집이었어요. 요즘 많이 헐렸지만 그래도 꽤 많지요." 김정삼(56.군산시 소룡동)씨는 "아직까지 일본 잔재가 남아있는 것은 도시 발전이 없기 때문"이라며 "요즘 군산은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영화의 촬영지로 인기를 끌 뿐"이라며 씁쓰레했다.
내항에서 걸어 10분 거리인 월명동, 신흥동에서 일본 가옥은 대충 헤아려도 100채가 넘을 듯 했다. 물론 원형 그대로는 남아있지 않고 개조·변형되긴 했지만 한눈에 오밀조밀한 일본식 가옥임을 알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보존상태가 완벽한 신흥동의 히로쓰 가옥이다. 예전 포목상인 히로쓰와 대한제분 사장이 살았던 집인데 ㄱ자 모양으로 붙은 건물 2채와 널다란 정원에 큼직한 석등이 놓여있다. 영화속에서 가끔 만날 수 있는 집인데 '장군의 아들' '타짜' 등을 찍었다. 타짜에서는 주인공인 조성우가 백윤식에게 노름을 배우러 갔다가 이 집의 자그마한 쪽문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군산은 일제가 만든 계획도시였다. 옥구군에 달린 조그마한 포구에 지나지 않던 군산이 1898년 강제 개항되면서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서 생산되던 곡물 집산지가 됐다. 내항 앞에는 예전 군산세관으로 쓰던 붉은 벽돌의 건물이 있는데 이곳의 이름은 장미(藏米)동이다. 동네이름으로 '감출 장'에 '쌀 미'라는 한자를 쓰는데서 보듯 예전 이 일대는 온통 쌀 천지였을 것이다. 현재에도 내항 부근에는 일본으로 실어가기 전에 쌀을 보관하던 낡고 큼직한 창고가 여럿 남아 있어 한때의 영화(?)를 보여준다.
옛 세관건물에서 50m쯤 내려오면 큼직한 은행건물이 보이는데 예전 조선은행 군산지점이다. 한때 카바레, 노래방으로 쓰이다 지금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건물이 됐다. 1차대전때 인질로 잡힌 독일인이 설계하고 1923년 중국인들이 공사를 했는데 여러 차례의 개조공사에도 불구하고 외양은 여전히 장엄했다. 쓰레기로 채워진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건물도 늙고 병든다고 하지만 이렇게 초라하게 변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탐욕은 어디까지?=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발산초교 뒤편에 가면 좀처럼 보기 힘든 건축물이 있다. 군산지역 대지주였던 시마타니가 1920년대에 지은 금고 용도의 건물이다.
3층의 콘크리트 건물로 입구에는 미국에서 수입한 두꺼운 철제금고 문이 달려 있고 창문에는 단단한 쇠창살과 철판이 박혀있다. 시마타니가 현금, 서류는 물론이고 인근에서 마구 수집한 서화와 골동품을 보관하는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남을 믿지 못해, 도둑이 들까봐 다른 나라에서 빼앗은 귀중품을 별도 건물에 몇겹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보관했으니 인간의 집착과 탐욕이 과연 어느정도까지 이를 수 있을지 짐작케한다.
금고 옆에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발산리 석등(보물 234호), 고려시대 작품인 5층석탑(보물 276호), 돌석상 등 20여점의 유물이 있는데 이것도 시마타니의 수집품이다. 해방후 그가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해 보존될 수 있었다. 군산, 김제 등에 150만평이 넘는 토지를 갖고 있던 시마타니는 해방 후에도 농장을 지키려고 한국 귀화를 주장하다 좌절되자 귀국길에 올랐다고 한다.
익산시 춘포면 춘포리에도 일본인들의 탐욕을 엿볼 수 있는 가옥이 한채 있다. 2층 건물로 1940년대에 지어진 큼직한 일본식 집이다. 예전 일본총리를 지낸 호소가와의 아버지 소유였는데 일본인 마름(토지관리인)이 살았던 곳이다. 500평 가까운 널찍한 대지에다 집 외관은 나무판자를 잇대놓아 마치 일본식 성곽을 보는 듯 했다.
주민 최기상(86)씨는 "이 동네엔 일본인 대지주 2명과 마름들이 살았는데 이 일대는 물론이고 익산, 김제 등에도 땅이 많았다."면서 "일본인 지주들은 한국인에게 그냥 빼앗다시피 헐값으로 땅을 사들여 대지주가 됐다."고 회고했다. 최씨의 아들인 석창(58)씨는 "일제 잔재를 과연 문화재로 보관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일제가 남겨놓은 흔적을 들러보면서 아이들과 함께 한번쯤은 전북 지역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역사체험에 이만한 것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글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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