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사과의 기술

몇 달 동안 미국에 다녀온 친구가 하는 말이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을 툭툭 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사람 통행이 많은 길이나 할인점, 지하철에서는 물론이고 넉넉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지나갈 수 있는 길에서도 별 생각 없이 다른 사람을 건드린다. 반만년을 함께 살아온 한민족이라, 한 다리만 건너면 알 사이라 허물이 없어서 그러는가.

몇 달이 아니라 단 며칠 동안 외국에 다녀오면서 나도 느끼게 된 게 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외국에서는 사람의 몸끼리 닿을 정도로 많으면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알아서 안으로 들어가겠지 혹은 좁히겠지 하는 태도로 몸을 집어넣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사람 사이만 그런 게 아니라 자동차끼리도 앞뒤는 물론이고 옆으로도 닿을 듯이 바짝 붙여서 다니는 게 우리나라의 풍습이다. 주차를 할 때 역시 그러지 않아도 좁은 주차선 안에서 최대한 가까이 붙여 놓아서 옆 차를 안 건드리고는 내릴 수가 없게 만들어놓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사소한 접촉으로 일어나는 사소한 손상에는 또 예민해서 손톱만한 자국이 나도 범퍼를 통째 갈아달라고 한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안으로 골병이 들었다면서. 이쯤이면 차가 아니라 가족이나 다름없다.

친구는 또 밤이면 밖에 나갈 일이 없어서 집안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간혹 무슨 일이 있어 밤에 나가게 되면 마주치는 상대가 누구든 늘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네는 게 버릇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돌아와 보니 밤이건 낮이건 길거리에서 웃는 낯을 한 사람 보기가 대낮에 별 보기나 다름없단다. 결론적으로 무표정하게 지나가며 툭툭 건드리고 또 그럼에도 무신경하게 지나치는 게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외국이 좋고 우리나라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풍토와 문화의 차이다.

개인이 총을 소유할 수도 있는 나라에서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예의바르게 대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어느 하루 저녁 밖에 나갔다가 총기사고를 당할 확률이 1백만분의 1이더라도, 그 1에 자신이 해당되지 않도록 집안에 있는 것 역시 당연하다.

거기에서 천년만년 살 사람이라면 1백만분의 1을 1조분의 1로 낮추려는 노력을 하겠지만. 앞에서 걸어오는 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환경에서 자라났는지 서로 모를 다인종, 다계층의 사회에서 길을 가다 지나가는 사람과 옷깃만 스쳐도 '실례합니다'라고 외치고 실수로 부딪치기라도 하면 '죽을 죄를 졌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평균수명을 늘리는 길임은 자명하다.

'껴안아주기 운동'은 신체적 거리가 먼 나라에서는 절실하게 다가올지 모르지만 원하든 원치 않든 갖가지 '스킨십'에 단련된 우리에게는 '이국적'인 일일 뿐이다. 신체적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것이지 없는 것은 아니므로 본의든 아니든 상대를 건드렸을 때 양해를 구하고 사과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런 사과에 익숙하지 않다.

"미안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사과드립니다" 우리는 이런 말이 얼마나 많은 분쟁을 방지하는지 잘 알고 있다. 개인을 넘어 견해가 서로 다른 단체, 세력끼리 본의 아니게 툭툭 건드리게 됐을 때 미안하다고 하는 한 마디 말이 전 사회적인 에너지 소모를 막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예전처럼 자존심 때문에 죽어도 사과를 못하겠다는 게 아니고 사과가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매끄러운 관계,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해 사과를 할 수도 있는데 사과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 게 문제다.

사과에는 분명히 기술이 필요하다. 기술은 위험과 피해를 분산하는 보험이나 마찬가지다. 가장 중요한 기술은 '진심으로 사과하라'는 것이다. 사과할 마음도 없이 형식적으로 어설프게 사과했다가는 더 큰 사과를 진실로 또는 진정으로 해도 안 될 상황을 맞게 될 수 있다.

상대가 분명하게 사과 의사를 확인할 수 있도록 적시에 그리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다. 궁극적으로는 사과할 일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고 조심하는 것이 최선이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데도 사과할 일이 생긴다면 그건 기술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천재지변에 해당한다.

성석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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