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태흥의 어린왕자와 떠난 히말라야] (10.끝)포카라에서 쓰는 편지

그리운 그대!

네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포카라(Pokhara)의 페와(Phewa) 호숫가에 앉아 있습니다. 며칠 전 묵디나트를 출발하여 까그베니(Kagbeni 2,800m) 좀솜(Jomsom 2,710m), 마르파(Marpha 2,670m) 그리고 베니(Beni)를 거쳐 어제 포카라에 도착했습니다. 하루 8시간 이상을 걸은 20여 일간의 강행군은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지만 마음은 날아갈듯 가볍습니다.

사실 이번 여행은 몸도 그랬지만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이번 여행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목표에 익숙해져 있는 삶이 안나푸르나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극복해야 하거나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하게끔 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묵디나트를 떠나 까그베니로 가는 길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미약하고 보잘것없는가를 뼈저리게 느껴야 했던 것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존재 때문이기도 했지만 시간 때문이었습니다. 폭을 가늠할 수 없는 강과 텅 빈 고원의 길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멈추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인간의 욕심으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영원한 침묵의 깊이는 지친 여행자에게 가야 할 곳과 지나온 곳을 돌이키게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인류가 선택한 두 종류의 길에 대해서 말했지요. 그 하나는 영토화, 코드화의 길이며 다른 하나는 탈주와 유목의 길이라고 말입니다. 앞선 영토화, 코드화의 길이란 삶의 주체들이 서로를 얽매고 마는 정착민의 삶이고 탈주와 유목의 길이란 자유를 위한 모험과 도전의 삶인 유목민의 삶입니다. 정착민의 삶을 둘뢰즈는 노예화의 길이라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목민의 삶이 언제나 정당하고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애당초 사람의 삶이란 마음은 늘 일상의 탈출을 꿈꾸지만 몸은 일상에 젖어 있게 마련이고 떠남은 용기가 아니라 타는 목마름에 있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이 순간 여행자는 떠나왔지만 다시 돌아갈 곳을 찾는 것은 그리움에 또다시 목말라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비우고 받아들이는 것,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대한 사유가 그저 마음을 가볍게 합니다.

아름다운 그대!

이곳 포카라로 오는 동안 지친 몸으로 경비행장이 있는 좀솜에서 이틀 동안 비행기를 기다렸습니다. 며칠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하지만 비행기는 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왔지만 그 비행기는 여행자를 외면하고 지역의 유지들을 태운 채 날아가버렸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차례가 되었노라고 소리쳤지만 늘 순서는 뒤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결국 힘이 들었지만 비행기를 포기하고 다시 걸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히말라야에는 새들이 낮게 난다고 말씀드렸지요. 높게 날 이유가 없다는 것, 그것은 목표나 목적에 낯설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언제나 우리는 목표나 목적을 두고 살아오지는 않았는지요. 마치 서두르지 않는다면, 뛰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처럼 앞을 보고 내달려 온 것은 아닌지요.

새들이 날 수 있는 이유는 뼛속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허공에 존재를 던질 수 있는 것, 비움에 있는 것처럼 세상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비움으로 시작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좀솜에서 마르파로 걸어들어가면서 사과꽃 향기를 맡습니다. 마르파는 히말라야에서 가장 맛있는 사과가 나는 곳입니다. 아마도 걷지 않았다면 이 향기를 맡지 못했겠지요. 사과꽃 향기 가득한 마을 곳곳에 아름다운 불교 사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는 것, 돌아가는 방법, 그 비움의 미학이 마르파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대!

'꽃이 필 때까지/ 꽃이 한 송이도 남김없이 다 필 때까지/ 꽃이 질 때까지/ 꽃이 한 송이도 남김없이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꽃잎이 날아갑니다/ 그대 생각으로 세월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깊어질 대로 깊어진 그 세월 속을/ 날아가던 꽃잎들이/ 그대에게 닿았다는 소식 여태 듣지 못했습니다.'

마흔이 훌쩍 넘어 어린 왕자를 안고 떠난 안나푸르나에는 김용택 시인의 '그대 생각'처럼 그대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진정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 익숙하지 못했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지극히 통속적이고 상투적인 감정이라고 외면했습니다. 쏘롱 고개를 넘으면서도, 묵디나트를 지나 영원한 은둔의 땅 무스탕을 보면서도 가슴 한편을 스치는 이 바람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 하지만 세상에 사람이 없다면,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싶습니다. 결국 떠남과 돌아옴의 모든 것에는 사랑이라는 울림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린 왕자가 꽃을 찾아 자신의 별로 돌아간 것처럼 안나푸르나도 여행자에게 이 긴 그리움을 안고 그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서툴러 발을 헛딛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젊은 날 세상에 대한 믿음이 그랬듯이 진실로 사랑하다 죽을지언정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 이번 여행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먼저 부족한 글을 인내로 보시고 성원을 아끼지 않으신 매일신문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긴 여행 내내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은주와 지민이, 지원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모진 병마와 싸우고 있는 기범이가 해맑은 미소를 되찾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면서 아울러 늘 거친 여행기에 지면을 허락해주신 매일신문 식구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전태흥 ㈜미래데이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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