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노라 옥주봉아 있거라 경천대야/요양만리길이 멀다야 얼마 멀며/북관일주년이 오래야 하랴마는/…/다시금 바라보고 우리 님 생각하니/오국한월을 뉘 땅이라 바라시며/이역풍상을 어이 그리 겪으신고/…/
병자호란 때 청(淸)에 볼모로 간 봉림대군(효종)을 심양에서 8년간 시봉한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선생이 가사체로 노래한 봉산곡(鳳山曲'일명 天臺別曲)이 소슬한 강바람을 맞고 있는 경천대(擎天臺).
굽이치는 낙동강 물길 중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는 경천대는 담연한 선비정신이 있어 한층 운치가 넘쳐난다. 깎아지른 절벽과 바위를 뚫은 노송, 강물을 향해 불쑥 뻗은 용머리바위와 용소를 이루며 틀어지는 푸른 강물 중 어느 것 하나 눈길을 잡지 않는 것이 없다.
기암절벽은 쳐다만 봐도 아찔하고 노송의 푸른 잎은 봄 햇살을 받아 완연한 빛을 띠는가 싶더니 유구한 강물은 깊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이런 연유에서 일까. 경천대는 하늘이 만든 절경이란 의미의 '자천대(自天臺)'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우담은 이 곳에서 벼슬을 멀리한 채 책읽기를 즐겼다. 아찔한 절벽은 게으름을 경계함이요, 푸른 솔잎은 충군(忠君)의 마음이자, 깊이를 모를 강물은 우국(憂國)의 애끓음이리라.
경천대 옆 단출한 정자 '무우정'은 우담의 이런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귀국 후에도 그는 이 곳에서 때를 기다리며 북벌의 의지를 다진다.
'경천대'비(碑)가 있는 벼랑을 따라 무우정으로 향하는 길엔 임진왜란 당시 명장 정기룡 장군이 용마와 더불어 수련할 때 바위를 파낸 말구유도 보인다. 무우정에서 용머리바위로 이어지는 숲길은 출렁다리와 드라마 세트장, 산악자전거 도로가 나 있어 혼자 걸어도 심심하지 않다.
경천대의 풍광에 더 심취하고자 한다면 무지산 정상 전망대에 올라보자. 탁 트인 상주시 사벌면 들판과 하늘이 만든 절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본격적인 모내기를 위해 논갈이와 물꼬를 터놓은 들녘에 따사로운 봄볕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때마침 열린 시골 장은 오랜만에 사람들로 붐볐다. 농사철을 앞두고 호미랑 낫을 사려는 촌로와 상인들 간에 흥정이 오갔다.
시장 한 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 수레. 한 촌로가 방금 쪄 낸 찐빵봉지를 들고 빙그레 웃고 있다. 손자에게 주려니 했더니 뒤에서 말없이 서있던 할머니에게 그 봉지를 내밀었다.
늙은 아내의 입가에 배시시 웃음이 배어났다.
문득 사람 사는 정이 그리워, 고향 같은 마을을 찾아 나선 '상주시 은자골(은척면 일대)'. 출발은 이렇게 살가운 시골 장터에서 시작됐다.
◆전국 유일한 우기리의 상주동학교당
1894년 2차 동학농민전쟁 최대 격전지였던 우금치(공주 견준산 기슭)전투에서 남접 전봉준이 이끈 동학교도들은 관군과 일본 연합군에 패함으로써 뿔뿔이 흩어진다. 이 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손병희의 이념이 교주 최제우의 사상과 어긋난다고 생각한 김주희(金周熙'동학농민전쟁 참전)도주가 스스로 남접을 칭하며 포교를 시작한 곳이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이다.
3칸짜리 초가집 4채가 마당을 중심으로 정방형을 이룬 동학교당은 새로 얹은 황금빛 이엉에 눈이 부신다. 입구 기둥엔 '덕을 널리 베풀고 후천운수가 열리기를 기원하며 국기를 바로 세워 백성들 편하게 한다'는 동학의 기본이념이 한지에 곱게 쓰여 있다.
안채로 들자 김 도주의 며느리 곽아기(82) 할머니와 아들 김정선 씨 두 모자가 불쑥 찾아 든 길손을 맞았다. 나머지 초가집은 기도당이다.
김 도주는 1915년 이곳에서 첫 동학교당을 열어 1943년까지 포교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이듬해 숨을 거둔다.
동학교당 바로 옆에는 일제에 압수당했던 교기, 의례복, 동학경전, 판목 및 당시 생활용품 1천84점을 회수해 따로 보관하는 유물전시관이 있다. 전시관 중앙엔 '창생을 질곡에서 건져내고 지상천국을 열어 국권을 바로 세우는 것이 동학의 최대 목표'임을 천명한 포교 이념이 김 도주의 영정과 나란히 걸려 있다.
이미 기울어 버린 국운과 열강의 등살에서 국권을 일으켜 세워보려던 민초들의 자생적 의지가 고스란히 녹아나는 이 곳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동학교당이다.
◆은척(銀尺)이 묻힌 남곡리의 은자산
옛적에 생명을 살리는 금자와 은자가 있었다. 신비한 두 자의 능력 덕에 죽는 사람 없이 인구가 늘면서 식량 부족과 흉흉한 인심을 우려한 나라에서는 이 두 자를 묻기로 결정한다. 이어 뒷날을 염려해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땅을 물색하니 물망에 오른 곳이 경주의 금척면과 상주의 은척면. '경상도'와 '은자골'의 지명이 이 전설에서 유래된다.
은자산은 그 은척이 묻힌 곳으로 얼핏 봐도 작은 언덕에 불과하지만 전설의 모태를 품고 있어 찾아볼 만하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남곡리의 성주봉자연휴양림
성주봉(해발 606m) 기슭에 자리한 성주봉자연휴양림은 최소한의 설비로 최대한의 다양한 숲 속 공간을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야영 데크와 텐트장은 물론 숲 속의 집과 단체 휴양관이 휴양림 초입에 조성돼 있고 계곡 곳곳에 구름다리와 물놀이 터 주차장 시설이 갖춰져 있다.
성주봉을 오르는 5개의 등산로 중 한 곳에는 150여m에 달하는 암벽 등산로가 마련돼 있다. 특히 15종의 야생화와 밤나무 단지로 조성된 5천여 평의 수목전시장은 자연학습 체험장으로 인기가 높다.
은자골 황령리 정보화 마을 추진위원회 김왕경 위원장은 "내년에 정보화마을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면 도시인들이 은자골에서 다양한 농촌체험과 유적지를 둘러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게 되면 숲 체험이외 각종 농가체험도 가능하게 된다.
◆작지만 천년의 도량 황령리의 황령사
칠봉산 자락 조그마한 언덕에 자리한 황령사는 작고 볼품이 없어 자칫 지나치기 쉬운 사찰이지만 은자골 사람들에게는 오랜 세월을 함께한 기복처이다.
일주문이나 범종각, 섬세하게 조각된 석등과 석탑 등은 없어도 빛바랜 단청과 팔작지붕의 폼세가 천년 도량임을 대변하고 있다. 대웅전 안에는 여느 절의 대웅전 불상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앙증맞게 작은 세 부처가 텅 빈 법당을 지키고 있다.
◆두곡리 뽕나무와 은행나무
쌀, 곶감, 누에는 상주를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만든 주역들이다. 이 중 은자골 두곡리에 가면 수령 300년이 넘는 씨받이 뽕나무가 있다. 높이는 12m, 아래 둥치의 둘레는 약 2m로 장정 세 사람이 손을 벌여야 겨우 둘레를 휘감을 수 있다.
아직도 나무의 생기가 왕성해 뽕나무 씨와 더불어 가을이면 맛있는 오디를 따 먹을 수 있다는 게 마을 사람들의 설명이다.
이 마을 초입엔 뽕나무와 더불어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은행나무도 볼거리. 수령은 약 450년 된 것으로 짐작되며 높이 15m, 밑 둘레가 13m에 달한다. 6.25전쟁 중에도 유독 두곡리에만 인명피해가 없어 마을의 덕목으로 숭상 받고 있다. 현재는 상반부 일부가 죽어 있으나 여전히 많은 양의 은행을 생산하는 암나무로 생장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허공을 향해 굳세게 뻗어 생명력을 자랑하는 은행나무 사이로 마을담장 곁에는 산수유가 노란 꽃잎을 터뜨린 채 은행나무를 부러운 듯 쳐다보고 있다.
#은자골 여행 Tip
은자골 기행을 마치고 상주시로 나올 때면 은척면 소재지에서 내서면 방향 25번 국도를 이용하면 더 많은 인근의 볼거리와 만날 수 있다.
17세기 초 지어진 우복 정경세 선생의 목조 종가를 시작으로 높이 13.2m, 폭 8m의 영산회괘불탱이 소장된 북장사와 자전거 박물관 및 남장사에 들러 볼 수도 있다.
특히 북장사의 영산회괘불탱은 석가모니불이 보살과 10대 제자, 사천왕상에 둘러 싸여 설법을 하는 장관이 그려져 있어 이 지역에서 가뭄이 들 때마다 괘불을 걸고 기우제를 올리면 큰 효험을 봤다고 전해진다. 괘불은 평소에는 북장사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으며 특별한 날에만 걸고 경을 읽는다.
한편 남장사에는 조선 초기 만들어진 철불좌상과 보광전의 목각탱이 유명하다.
◇은자골 가는 길=경부고속도로 김천 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진입해 북상주나들목에서 내린다. 이어 상주방향 3번 국도로 진행하다가 외서'사벌 교차로에서 나와 은척면과 성주봉 휴양림 방향으로 계속 가다보면 우산재라는 고갯길이 나오고 이 고개를 넘으면 은자골이 시작된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한동훈 이틀 연속 '소신 정치' 선언에…여당 중진들 '무모한 관종정치'
국가 위기에도 정쟁 골몰하는 野 대표, 한술 더뜨는 與 대표
비수도권 강타한 대출 규제…서울·수도권 집값 오를 동안 비수도권은 하락
[매일칼럼] 한동훈 방식은 필패한다
"김건희 특검법, 대통령 거부로 재표결 시 이탈표 더 늘 것" 박주민이 내다본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