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 한권의 책] 화가와 모델/이주헌

거울에 비친 사물과 그림 속 사물은 다르다. 거울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면, 그림은 화가라는 필터를 통해 재창조된 사물일 것이다. '화가와 모델'은 모델이 서양미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책은 그래서 작품뿐만 아니라 화가와 모델의 인간적 관계에 대해 상당한 양을 할애하고 있다. 우정마저 저버린 밀레이와 에피의 사랑, 예술가간의 가장 인상적인 사랑을 세인에게 알려준 오귀스트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 주검이 돼서도 남편 모네의 모델이 돼 주었던 카미유 동시외, 부도덕한 사랑을 예술적 에너지 원천으로 삼았던 로제티 등 수많은 화가들과 모델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자화상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자화상은 모델을 구하기 힘든 습작기 화가에게는 좋은 훈련 수단이었다. 비용이 들지 않았고, 최대한 성의 있게 응해주던 모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화상을 평생 주제로 그리는 작가는 드물다. 내다 팔기도 어렵고, 초상화의 한줄기에 불과한 자화상에 예술적 열정을 모두 담아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자화상이란 인생의 고비에 직면한 화가들이 내면으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기 위해 그리는 그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화가도 있었다. 멕시코 출신의 화가 프리다 칼로는 평생 자신을 그리는 데 모든 열정을 바쳤다. 그녀는 자신이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너무나 자주 외롭고 또 무엇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이기 때문이다."

프리다 칼로는 불우한 예술가였다. 여섯 살에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불구가 됐고, 친구들로부터 '나무다리 프리다'라는 놀림을 받으며 자랐다. 소외된 자신의 상(像)에 눈 뜰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8세 때, 타고 가던 버스가 전차와 충돌해 중상을 입었다. 대퇴골과 갈비뼈가 부러졌고, 골반 세 군데와 왼쪽 다리 열 한군데가 골절됐다. 오른쪽 발은 으스러졌고, 왼쪽 어깨는 탈구됐다. 버스 난간 창살이 배를 뚫고 들어와 질을 통해 빠져나갔다. 그리고도 죽지 않았다. 칼로는 강철 코르셋을 입고 다녀야 했다.

칼로의 자화상 '부서진 기둥'엔 온 몸에 못이 촘촘히 박혀 있고, 척추대신 신전 기둥을 붙였다. 눈에서는 비 오듯 눈물이 쏟아지고 있다. 그녀의 또 다른 자화상 '부상당한 사슴'은 온 몸에 화살이 꽂힌 사슴이 피를 흘리고 있다. 몸은 사슴이고 얼굴은 칼로 자신이다.

에곤 실레의 그림에서는 성과 죽음에 대한 실레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성과 죽음을 다루고 있지만 실레의 그림은 클림트의 그림과 달리 감미로운 맛이 없다. 실레의 그림에서 성과 죽음은 오직 강박과 집착, 오염과 몰락, 광기로 가득 차 있다. 실레의 그림이 불편하고 파괴적인 것은 그가 성장한 집안 분위기와 당시(1900년대 초) 오스트리아 빈의 시대상이 반영된 때문으로 보인다. 실레의 아버지는 결혼 전에 이미 매독에 걸려 있었고, 광기가 대단했다. 또한 당시 빈은 겉으로 엄격한 도덕률을 내세웠지만 속으로 방종하고 타락한 도시였다.

이 책 '화가와 모델'은 화가와 모델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림에 대한 세밀한 관찰 기회를 제공한다. 문외한의 눈이 놓치기 십상인 부분에 일일이 설명을 곁들임으로써, 그림의 배경과 화가의 심리까지 세세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룰을 몰라 재미없던 게임이 룰을 알고 나면 재미있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설명

1. 렘브란트 '밧세바'- 밧세바는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내이자 솔로몬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그녀의 첫 남편은 다윗의 부하 군인 우리아였다. 어느 날 목욕중인 밧세바를 다윗이 발견한다. 그 모습에 반한 왕 다윗은 밧세바에게 '냉큼 궁궐로 들어와 잠자리를 하자.'고 전갈을 보냈다. 목욕하는 밧세바의 오른 손에 왕 다윗이 보낸 전갈이 들려 있다. 여자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자신이 왕과 잠자리를 하게 될 경우 한낱 졸병에 불과한 남편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녀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다윗은 전장에 나간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가 죽을 수밖에 없는 전투대형을 짰고 우리아는 전사했다.

2. 카미유 클로델 '중년'-클로델 자신과 로댕의 비극적인 관계를 표현한 조각이다. 한 중년 남자가 늙수그레한 여인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떠나고 있고, 그 뒤에 젊은 여인이 무릎을 꿇은 채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있다. 로댕이 클로델 자신을 떠나 동거녀 로즈 뵈레를 따라 떠났음을 암시한다.

3. 칼로의 자화상, '부서진 기둥'- 칼로에게 건강의 회복이란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녀는 1925년 12월 5일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유일한 희소식은 이제 내가 참는데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칼로는 버스사고로 침대에 오래 누워지냈는데, 이때 그녀의 어머니는 커다란 거울을 침대 위에 달아 주었다. 칼로는 눈만 뜨면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았고, 평생의 모델이 될 자기 이미지를 만났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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