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 전사'는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치부되던 고전을 독자 곁으로 가져온 책이다. 물론 책의 두께나 주제만 놓고 보면 여전히 부담스럽다. 속도의 파시즘, 성서와 칼, 자연의 인간화, 박지원과 정약용, 허준과 푸코, 소월과 만해, 변강쇠와 옹녀, 유목민과 정착민, 대장금의 장금이…. 목차만 보면 슬슬 짜증이 날만하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 다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고미숙(저자)이라는 탁월한 인터뷰어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각각의 인물을 만나고, 그 소감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고미숙은 드라마 대장금의 장금이를 높이 평가한다. 장금이가 지금까지 드라마 여주인공과 다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대부분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랑에 빠진 여성은 '사랑밖에 모른다.' 사랑에 속고, 사랑에 울고, 사랑에 웃고, 사랑에 죽는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이 나오는 드라마의 명암은 흑 아니면 백이다. 주인공인 두 남녀는 밝게, 그 나머지는 모두 어둡게 처리돼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또한 사랑하는 남녀에게는 사랑 외에 나머지 일들, 예컨대 직장이나 학교, 사업이나 가족관계는 배제돼 버린다. 가끔 등장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희미한 배경일 뿐이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다.
사람살이가 어디 그런가? 사랑에 빠진 남녀는 안 먹어도 살고, 안 씻어도 향기롭고, 회사에 안 나가도 월급을 받는가? 어림없다. 그럼에도 드라마 속 주인공은 먹지도 입지도, 씻지도 일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직 사랑만 있다.
그러나 대장금의 장금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과 일 모두를 버리지 않았다. 연인의 품에 안긴 장금이 보다 음식 맛을 보던 장금이가 더 익숙하지 않은가? 사실 우리는 사랑과 일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 사랑과 일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하나를 버리는 순간 나머지 하나 역시 존재하기 어렵다. 변호사인 애인이 변호사를 때려치워도 사랑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장금이는 '사랑=전부=집착'으로 본 것이 아니라 사랑을 삶의 하나로 보았다.
영화 '올드보이'를 생각해보자. 영화에서 최민식을 파멸시킨 유지태는 그 자리에서 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자살할 총으로 최민식을 죽이고, 흔적 없이 청소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왜? 유지태는 그처럼 무의미하게 죽어버리는가? 정신분석학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답은 간단하다.
유지태에게는 '복수=집착=전부'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누나를 자살로 몰아가게 한 나쁜 놈들을 응징하기 위해 그는 그 날까지 살아왔으며, 그 응징(집착)이 끝나는 순간 '삶의 의미' 역시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드라마가 3류인 것은 '사랑=전부'라는 설정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 3류 드라마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진짜 세상살이에 다소 질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진짜 삶과 진짜 사랑은 드라마 속 삶이나 사랑이 아니라, 다소 너저분해 보이는 일상의 삶과 사랑이다. 대장금의 장금이처럼, 우리의 세상살이에는 사랑도 있고, 증오도 있고, 밥도 있고, 죽도 있고, 눈물도 있고, 웃음도 있다. 드라마 속 사랑처럼 꼭 연적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연적이 없다고 그 사랑이 덜 낭만적이지도 않다.
고미숙은 고전의 인물을 통해 '생동감 넘치는 사람살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그녀의 이야기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분명한 것은 고미숙이 이야기하는 고전은 어렵지 않으며, 그녀가 전하는 삶과 사랑은 만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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