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만큼 시대 흐름과 맞닿아 있는 것이 어디 있을까. 생활환경이 바뀌거나 신기술이 등장하면 수많은 직업이 생기고, 그 흐름에 뒤처지는 직업은 서서히 사라졌다. 우리 주위에서 점차 없어지고 있는 직업을 찾아 나섰다.
솥, 냄비 따위를 때워주는 '땜장이'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시골 장터에서 찾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허사였다. 몇천 원만 주면 새것을 살 수 있는데 굳이 때우는 번거로움을 감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경북 영주, 청송 등의 장터에는 '땜장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흔적도 없다. 예전에 땜질을 하던 사람이라도 만나고 싶었지만 대부분 나이가 많아 돌아가셨다고 한다.
예전 큰 풍로를 짊어지고 굴뚝을 뚫어주던 '굴뚝 청소부'도 마찬가지다. 아궁이에 불을 피워 온돌을 데우는 집이 없기 때문이다. 똥 지게를 지던 사람이나 뱃사공도 사라졌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우산이나 선풍기를 고쳐주는 사람은 아직 남아있다. 대구에도 노인 한 명이 리어카를 끌고 다닌다는데 여름철이 아니어서 만날 수 없었다.
그나마 칼을 갈거나 톱날을 세우는 사람들은 꽤 남아 있었다.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시골장의 한쪽에서 그들과 만날 수 있었다.
◆칼·가위를 가는 사람=지난 19일 오후 안동시 안흥동 사장뚝네거리에서 만난 김삼진(60) 씨. 20년 넘게 모퉁이 노점에 앉아 칼·가위를 갈고 골동품, 갓 등을 팔고 있다. 그는 칼을 갈다가 심심하면 행인들에게 소리 한 자락을 들려주는 만능 재주꾼이다.
그는 5분도 채 안 돼 이가 쑹쑹 빠진 칼을 반짝반짝 빛나는 새 칼처럼 만들어냈다. 그라인더로 칼날을 깎아내고 숯돌로 가는 간단한 공정인 것 같지만 숙달된 솜씨가 필요하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교한 작업이에요. 잘못 갈아놓으면 며칠만 칼을 쓰더라도 금방 이가 빠지고 말지요." 그의 노점에는 상인이나 가정집에서 맡겨놓은 칼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그는 1시간 정도면 칼 40개 정도는 너끈하게 갈 수 있지만 갈수록 예전보다 주문이 줄고 있다고 했다.
"칼이나 가위 갈아요…." 전북 익산에서 만난 장길용(69) 씨는 자전거에 스피커를 달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칼·가위를 갈고 있다.
동네사람들이 찾아오면 자전거에서 그라인더와 숯돌을 꺼내 길거리에 주저앉아 칼·가위를 간다. 칼·가위 하나에 3천 원을 받지만 동네 아주머니와 실랑이를 하다 보면 2천 원이나 1천500원에 해주기도 한다. "사람 말고는 뭐든지 다 갈 수 있지요. 예전에는 바늘을 갈아달라며 맡기는 사람이 있었는데 요즘은 없어요." 장씨는 젊을 때는 울산 등지로 돈을 벌러 다녔는데 이제는 소일거리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칼은 누구나 갈 수 있지만 가위는 좀 힘들어요. 두 날이 맞물려 움직이기 때문에 잘못 갈면 못쓰게 되지요."라고 했다.
대구 서문시장, 칠성시장 등에도 칼 가는 사람이 있지만 칼질을 많이 하는 상인을 주고객으로 하기 때문에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았다.
◆톱날을 세우는 사람=시골장에서 빠트릴 수 없는 장면은 톱날을 세우는 일이다. 장터마다 톱날을 세우는 사람이 꼭 한두 명씩은 있다. 톱은 농촌에서 나무를 베거나 나무 상자를 만들 때 필요한 도구다.
톱날을 세우는 과정은 아주 세밀하다. 그라인더로 두 쪽으로 갈라진 톱날 사이를 일일이 다듬은 후 줄질을 하면서 날을 세운다. 경북 의성군 안계장터에서 만난 시장공구상사의 김정학(49) 씨는 "톱의 양날을 각(角) 있게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녹슬고 뭉툭한 톱날이 김씨의 손을 거치고 나면 날카롭고 반듯한 톱날로 변했다.
"예전에는 주문이 너무 많이 들어와 점심을 걸러가며 일을 했는데 요즘은 하루 10여 개가 고작이죠. 10년 후쯤이면 톱날 세우는 사람이 아예 없어지지 않을까요." 농촌에서 젊은 사람들은 기계톱을 쓰고 나이 든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니 언젠가 이 직업마저 사라질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장돌뱅이'라고 소개하며 웃었다. 5일장이 열리는 문경, 청송, 의성 등을 돌아다니며 톱날을 세우는 김 씨는 "세밀한 기술이 필요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데 얼마나 오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의성에서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탑리로 잘 알려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의 한 이발소에 들렀다. 아직도 주인이 면도칼을 가죽에 갈아쓴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현대이용소 주인 최성모(61) 씨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지금은 날만 갈아끼우는 미제 면도칼을 쓴다."고 했다. 면도칼을 2, 3일에 한 번씩 가죽에 쓱쓱 갈아 놓으면 수염 많은 손님들에게는 제격이었다고 한다. 살도 베지 않고 매끈하고 부드럽게 수염을 잘라줬다는 것이다.
"손님들이 돈이나 아끼는 '좀생이' 로 보는 듯해 할 수 없이 면도칼을 바꿨어요. 예전에 쓰던 면도칼이 훨씬 좋았는데…."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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