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그리움 속으로 걸어가다

어디 남녘 구례 산동마을에만 산수유 피던가요? 둘러보면 내 고향 언덕이며 시냇가에도 그리움처럼 노란 산수유가 피어나는 것을….

나이 거꾸로 먹어 다시 철이 없어진 건가요? 이른 봄날 몸 근지러워 봄바람 난 남자 몇이 산수유를 찾아 길 나섰습니다. 의성군 사곡면 화전2리 숲실 마을입니다. 그림 그리는 이가 둘, 보통 돈 많은 사람들의 행세가 그렇고 그런데도 전혀 티 내지 않는 괜찮은 사장님이 한 분, 나, 이렇게 네 사람이 동행입니다.

아직은 꽃구경이 조금 일렀습니다. 양지쪽 따스한 언덕에는 그런대로 꽃잎이 열려 노란 물감을 흩뿌린 듯했으나, 응달진 산자락에는 아직 꽃이 일러 다음 주말쯤은 되어야 꽃이 만개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꽃을 보러 온 분들이 많았습니다. 손을 잡고 꽃구경하는 젊은 연인들은 보기만 해도 행복해 보입니다. 왠지 닮아 보이는 중년의 부부들도 눈에 띄고, 소풍 삼아 음식을 준비해 자리를 잡은 가족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커다란 카메라를 펼쳐놓고 한 컷의 멋진 봄 풍경을 담는 사진작가들도 많이 보입니다. 밭머리 봄나물을 캐는 아낙들은 봄 처녀같이 설렙니다. 꽃구경 겸사겸사 산에 올라가는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도 눈에 띕니다.

누군가의 말이 생각납니다. 산수유꽃은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수많은 꽃잎이 어우러져서 아름다움을 이룹니다.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나 혼자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나와 이웃이 어울려 하나가 될 때, 노래에서처럼 진정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지요.

산수유는 그리움을 담은 꽃입니다. 그 노란 꽃무더기를 보면 왠지 모를 유년의 기억들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고샅길을 달리며 바람개비를 돌리던 어린 시절의 꿈이며, 시간의 수레바퀴 저편,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시절로 나를 이끕니다.

지난 겨울 찬바람 속에 꽃눈은 그 얼마나 아픔을 삭였을까요. 꽃망울이 터지기까지 그 산고의 아픔은 또 어떠했을까요. 문득 이호우 시인의 '개화'가 떠오릅니다.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빛도 숨을 죽이네. / 나도 가만 눈을 감네.

가만히 생각해보면 꽃은 활짝 피었을 때만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피기까지의 그 시간이 내겐 소중하고 행복한 기다림입니다. 못 둑에 올라 봄물을 내려다봅니다. 맑고 잔잔합니다. 거기 내 마음을 비춰봅니다.

고개 들어 건너편 산언저리 둘러봅니다. 푸릇하니 봄빛 어립니다. 이제 곧 냉이며 달래, 쑥잎이 푸르게 언덕길을 덮을 것입니다. 제비꽃, 할미꽃, 민들레가 반가운 그 얼굴을 내밀 것이며, 찔레꽃 연한 새순이 돋아나오고 진달래 피는, 황사바람 부는 이 땅의 봄날은 또 그렇게 올 것입니다.

산길을 걸어 내려와 마을 입구, 아까 그 사진작가들 틈에 나도 낍니다. 그분들의 포커스에 맞춰 부끄럽지만 나도 슬그머니 자그마한 카메라를 꺼내듭니다. 멀리 빨간 지붕을 얹은 교회의 십자가 아래, 밭일하는 농부의 곁으로 샛노란 산수유가 한폭 그림입니다.

그 풍경 속으로 손을 내밀어 잘 핀 산수유 한 가지를 몰래 꺾어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아내에게 줄 겁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나는 산수유 노란 그리움 속을 꿈꾸듯 헤맸습니다.

주영욱(시인·안동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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