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BMW' 를 타는 어르신들께

독일에는 'BMW fahrer(베·엠·뵈·풔아러)'란 말이 있다. 'BMW운전사'라는 속어로 눈먼돈 쉽게 벌었거나 돈 있는 티 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고급차를 타고 나보란 듯이 거들먹거리는 걸 빗댄 뜻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사회에는 직장도 없고 소득도 변변찮으면서 BMW를 타는 분들이 넘쳐나고있다. 속칭 'BMW어르신들'이다. 65세 이상 어르신네들 사이에 지하철 공짜로 탄다는 地空道師(지공도사) 속어가 생긴지는 벌써고 요즘엔 'BMW어르신'이란 新造語(신조어)까지 생겨났다는 것이다. B는 Bus(버스), M은 Metro(지하철), W는 Walking(워킹, 자기발로 걷는)이란 뜻이다.

독일 BMW族(족)은 두둑한 호주머니에 거들먹댈 기분이라도 나겠지만 건실한 사회복지 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성장 단계에서 조기퇴역과 일터박탈부터 강행되고 정년세대 새 일자리 창출효과가 캄캄한 이 땅의 'BMW어르신'들은 사정이 다르다. 쾌적한 진짜 BMW 대신 Bus와 Metro와 Walking으로 다니는 불편과 고통을 겪으면서 인간적 갈등과 함께 노후자금을 지키자는 自救策(자구책)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소외와 박탈감의 위기의식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고 있다. 부모자식 간의 노후보장을 둘러싼 人倫(인륜)의 붕괴 그리고 '재산을 다 물려주면 끝장이다'거나 병들 때를 대비해 '끝까지 주머니는 지켜라'는 자기방어로 자식의 사랑과 존경을 잃는다는 점이다.

오늘날 BMW어르신들의 세계에서는 유산 분배의 시기와 규모를 둘러싸고 빚어진 이런저런 인륜 붕괴의 일화들이 유난히 더 회자된다.

어느 저명한 퇴역의사가 자식을 상대로 소송을 했다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평택인가 어디서는 이런 실화도 있다. 보상받은 땅값 재산을 다 나눠준 뒤 1년도 채 안돼 용돈도 끊기고 손자들 방문도 줄어진 농부가 옛 친구에게 무정한 자식들의 냉대를 신세타령했다. 그러자 이 친구가 농부자녀들을 서울까지 찾아가 저녁을 냈다. 사업은 잘 되냐 아이들 공부는 잘하느냐 이런저런 덕담을 해주다가 슬쩍 한마디 혼잣말처럼 흘렸다. '전에 자네들 부친이 땅 보상받을 때 그쪽 어디에 남아있던 땅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며칠 뒤 느닷없이 자식들이 합동으로 아버지 용돈 쓰시라며 1억 원인가를 모아왔다. 그 뒤 1년 만에 농부는 자식들 병원비 든다고 병든 몸을 감춘 채 세상을 떴다. 통장에는 9천 만 원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BMW만 타고 다녔으니 돈쓸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뒤 자녀들이 부친 친구를 찾아왔다. '아저씨, 그때 말씀하시던 그땅. 혹시 아시는지….' '에라 이녀석들. 땅은 무슨놈의 땅. 애비 홀대한다기에 내가 지어낸 소리지!' 그런 일화들이 'BMW어르신'들로 하여금 자식이 힘들어서 내미는 손도 뿌리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주변 세상이 그렇게 막가고 변해 가는데 나무랄 일이 못 된다. 그러나 사랑과 인륜이란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어느 성직 지도자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은 어차피 세상을 떠납니다. 인생의 후반은 생의 마지막을 온전히 평화스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순명의 시기입니다. 아등바등 더 살아보려고 온갖 물질을 다 소모하고 자식과 주변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탈진시키고 결국에는 버둥대지 않은 사람과 똑같이 빈손으로 떠나가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받아들일 준비를 잘 할 줄 알아야 마지막을 잘 사는 것입니다. 힘든 자식 어려운 이웃 외면하고 혼자서 값진 것, 좋다는 음식, 좋다는 약에 매달리는 모습은 깨끗하고 존중받는 노년의 모습이 못 됩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걸어서 다니시더라도 마음은 억대짜리 진짜 BMW를 타고 다니는 듯 비운 마음으로 사시면 더 오래 여생의 길을 평화롭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엔 효자가 더 많습니다. 생명의 집착도 서운함도 다 비우고 손해보더라도 사랑으로 순명하리라는 빈 마음. 못난 자식들도 그런 어버이는 사랑하고 존중할 것입니다.

金廷吉 명예주필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