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천 박인수씨 北의 형 석수씨와 눈물의 화상상봉

"인수야…할 말이 없구나…"

"반가움보다는 궁금함이 더 크네요."

27일 오전 7시 대구 중구 달성동 대한적십자사 대구지사에서 이산가족 화상상봉을 앞두고 있던 박인수(74·경북 영천시) 씨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지난 15일 화상상봉 가족으로 결정된 이후부터 가슴이 벅찼지만 막상 화상상봉 당일이 되니 무덤덤하다는 박 씨. "어찌 이렇게 오랫동안 못 볼 수 있었을까요." 60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를 회상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다는 박 씨는 애써 침착하려 했다.

1941년 일제의 징용을 피해 만주로 가야했던 형 박석수(79·북한) 씨와 대구역 앞에서 헤어진 이후 65년 만이다.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누님(붓들·2005년 작고) 손에 자랐다는 박 씨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것은 10년 전.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14세의 나이로 만주로 간 뒤 소식이 끊겨 해방 이후 생사여부를 알 수 없었던 형 석수 씨가 살아있다는 것을 박 씨가 안 것은 지난해 이맘때.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박 씨의 머릿속에선 '죽기 전에 한 번은 봐야할 텐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오전 8시. 모니터의 푸른 빛이 삽시간에 북측 가족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박 씨에게 기억 속에만 남아있던 소년 석수 씨의 모습 대신 백발의 노인이 눈에 잡혔다.

"인수야, 이렇게 보니 할 말이 없다." 형 석수 씨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었다. 중풍 증세가 있다는 석수 씨는 혈육의 정만은 잊지 않은 듯 손수건으로 연방 눈을 짓눌렀다.

"누님이 살아생전에 꼭 만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는데…." 부인 김봉수(69) 씨와 둘째 아들 용주(42) 씨와 나란히 앉아 있던 박 씨는 누님의 별세 소식을 전하며 목이 멨다.

"누님도 살아계실 줄 알았는데…."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석수 씨에게 딸 정숙(47) 씨가 누님 붓들 씨의 작고소식을 전하자 석수 씨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졌다.

박 씨가 열 살이던 1941년, 어렴풋이 기억나는 생이별의 기억들.

이후 2시간 동안 이어진 화상상봉은 이들에게 가족을 소개하고 헤어진 연유를 풀어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지난 60년간의 세월을 뛰어넘기엔 터무니없이 모자라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박 씨는 운이 좋은 편이다. 여전히 전국적으로 10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들이 화상상봉의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 8월 시범실시돼 다섯 번째를 맞는 남북이산가족 화상상봉은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간 대구를 비롯해 전국 13개 화상상봉장에서 열린다. 전국적으로 60가족, 대구에서만 박인수 씨를 포함해 7가족이 화상상봉을 통해 만나게 됐다. 이번 남북이산가족 화상상봉은 지난해 2월 개최된 이후 13개월 만이며, 지난 2일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이달 중 이산가족 화상상봉을 실시하고 5월 초 대면상봉을 실시한다는 합의에 따라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한편 2일 있었던 장관급회담에서는 지난해 7월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 중단됐던 금강산 면회소 건설도 재개키로 합의한 바 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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