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종문의 펀펀야구] 전병호의 야구인생

싱커의 고수가 되기까지

늘 미소를 띠고 있어 전혀 고민이 없을 것 같은 전병호도 한때는 은퇴를 고민할 만큼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입단 다음해인 1997년에 10승을 거뒀지만 8패도 함께 기록해 승률(0.555)은 높지 않았다. 140km대 초반의 직구와 슬라이더, 완성되지 않은 포크볼 만으로는 승부가 단조로웠기 때문이었다.

위기는 빨리 찾아왔다. 1998년 시즌 외국인 좌완 투수 베이커에게 선발 자리를 내주고 중간 계투로 돌아선 뒤부터 등판 기회도 줄었고 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더구나 팔꿈치에 통증을 느끼면서 어깨가 조금씩 아래로 처져 승부구인 슬라이더의 각도마저 무뎌졌다. 선수 생활은 점점 꼬여갔고 눈앞에 닥친 군복무 문제도 스물 여덟 청년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했다.

1999년 시즌이 끝나자 성적은 3승2패로 형편없이 떨어져 있었다. 부랴부랴 군(방위)에 입대했지만 상심한 나머지 거의 공을 잡지 않았다. 2001년 시즌에 복귀했으나 문제점은 여전했다. 설상가상으로 더 처져버린 팔꿈치 탓에 평균 구속도 135km로 줄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막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가졌다는 것 뿐. 등판해도 실패를 거듭하자 "이제는 정말 선수 생명이 끝난 것인가."라는 회의가 들었고 답답한 마음에 술을 찾는 횟수도 늘어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 김고운 씨의 마음도 착잡하기는 마찬가지. 역전을 허용해 풀이 죽어 귀가한 어느 날, 참다못한 아내가 정색을 하며 나무랐다. "여보, 젊은 사람이 왜 그래요. 우리가 뭘 해도 못 먹고 살겠어요? 내가 식당이라도 해서 먹고 살 테니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세요. 우린 이제 시작이잖아요."

전병호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내에게 미안했지만 또 한편 고맙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전병호는 자신 있게 던질 수 있는 승부구 없이는 좋아하는 야구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싱커(sinker)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싱커의 감각을 익히기 위해 1년 내내 손에서 야구공을 놓지 않았다. 엄지와 검지, 중지에는 굳은살이 붙었고 굳은살에 실밥이 걸리는 느낌이 차이날 때마다 싱커는 예리하게 변해갔다. 때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2002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 선발로 나서게 된 것이다. 완급 조절과 싱커의 배합으로 4이닝 1피안타 무실점을 기록, 6대0 승리의 발판을 놓았다. 4년간의 방황에서 해방된 날이었다.

이날 얻은 자신감으로 전병호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후로도 계속 싱커를 가다듬었고 눈감고도 던질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싱커를 주무기로 삼성의 주축 선발투수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인생에서 누구에게나 시련은 찾아오게 마련이지만 어떻게 극복하는가는 스스로의 몫이다. 전병호는 말했다. 시련의 기로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 그 사람은 이름도 고운 김고운 씨, 내 아내라고.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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