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절하고도 구성진 남도의 소리가락을 닮은 나지막한 구릉과 가파른 산비탈마다 허리춤 높이의 차나무가 봄 햇살을 한껏 받아들이고 있다. 다가올 5월의 녹색정원을 위해서다.
멀리서 보면 아직은 겨울의 티를 벗지 못해 특유의 제 빛을 내지 못하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여린 찻잎들이 새순을 돋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가늘디 가는 차나무 가지 끝.
난초가 첫 촉을 세우듯 연노란 찻잎이 첫 싹을 틔웠다. 여린 이파리는 아직은 말려있어 모양새는 창(槍)을 닮았다.
다른 한 쪽에선 말렸던 이파리가 반쯤 펴지고 있다. 봄바람이 일렁거리자 일순 착시처럼, 작은 흔들림이 포착된다. 그 모양새가 미세한 깃발(旗)의 흔들림 같다.
이를 일러 일창일기(一槍一旗)라 한다.
매년 곡우 전 4월 중순이 되면 차나무 꼭대기에는 이 같은 일창일기가 하늘을 향해 빼곡히 솟아오른다. 이를 조심스럽게 따 모으면 올해의 첫차인 우전이다.
우전 채취 이후에는 창의 돋음과 기의 펴짐이 본격화되며 녹색정원에서는 세작, 중작, 대작 순의 차가 잇따라 만들어지면서 녹향도 더불어 짙어진다.
아마 그 때쯤이면 보성차밭은 진녹색 정원의 꿈이 이뤄질 것이다.
*
능선마다 볼록볼록!. 엠보싱 융단을 깔아놓은 녹차 밭 풍경은 눈 닿는 곳마다 한 폭의 수채화다. 산등성이를 도는 것도 모자라 산허리마저 휘감은 드넓은 차나무 고랑들의 무한행렬은 차라리 기하학적 곡선미의 집합과 같다.
보성 차밭들 중 가장 넓고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보성다원.
25만여 평의 차밭에서 연간 120t의 녹차를 생산하는 이 곳의 초입은 그림엽서처럼 예쁜 삼나무 길. 하늘을 가릴 만큼 높고 곧게 뻗은 아름드리 삼나무 숲길은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차나무 동해(凍害)와 직사광선을 막기 위해 조성했던 삼나무 숲이 이제 차밭전경과 함께 연인들이 가장 찾고 싶은 명소가 됐다.
삼나무 숲 사이 작은 계류를 흐르는 맑은 물소리가 긴 여행의 나른함을 달래줄 즈음 능선을 따라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차밭이 눈앞에 열렸다.
그윽한 차향 정취에 빠져 볼 요량으로 녹차 밭에 뛰어 들지만 때 이른 감이 있어 진녹색의 찻잎은 아직 돋지 않았다. 대신 군데군데 가녀린 가지 끝에 핀 연노란 새순들이 봄 햇살을 다투며 기지개를 편다.
보성차밭이 완연한 녹색정원으로 거듭나는 시점은 5월이다. 4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새순 채취를 시작으로 연녹색의 어린 찻잎이 진녹색이 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5월이 되면 그야말로 짙푸른 녹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성급했던 차향의 정취를 뒤로 하고 산책로를 따라 차밭 능선 꼭대기에 올랐다. 본래 차밭은 올려볼 때보다 내려다 볼 때 더 아름다운 풍광이 전개된다.
가파른 능선에서 남녘의 봄바람이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 차나무 위를 스쳐지나가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진다.
CF, 드라마,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던 현장이었던 보성차밭을 찾은 사람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여념이 없고 연인들의 사랑은 찻잎과 함께 짙어간다. 다원이 마련한 녹차 시음장에 들러 단돈 1천원에 맛보는 우전 차나 녹차 아이스크림은 눈과 입을 즐겁게한다.
발길을 따라 걷다가/ 바닷가 마을 지날 때/ 착한 마음씨의 사람들과/ 밤새워 얘기 하리라/ 산에는 꽃이 피어나고/ 물가에 붕어 있으면/ 돌멩이 위에 걸터앉아/ 그 곳에 쉬어가리라/ 이 땅에 흙냄새 나면/ 아무데라도 좋아라/ 아 오늘밤도 꿈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모습들/ 가다 가다가 지치면/ 다시 돌아오리라/…/ 그대의 정든 품으로.
이광조가 부르는 '나들이'의 가사처럼 연두색 찻잎 세상에 몸을 담그고 차나무 고랑을 따라 걸으면 꿈속에 떠오르던 아름다운 모습들이 연상된다.
그러나 꿈은 짧았다. 빠듯한 일정 탓도 있이다.
녹향의 그윽함을 그리면서 보성다원을 나와 녹차해수탕이 있는 율포 해수욕장 가는 도중 붓재를 넘자 산비탈마다 녹색비단을 말아 놓은 듯 계단식 차밭이 이어진다. 저 멀리 득량만의 싱그러운 바다와 어우러진 녹차 밭이 가슴까지 시원하다.
회천면사무소를 지나면 득량만의 갯벌에서는 꼬막조개를 줍는 아낙들의 손길이 바쁘다. 조금 더 가자니 15만여 평의 평지에 조성된 회천면 회령리의 녹차 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드라마 '여름향기'의 촬영지로 유명할 뿐 아니라 5월 초 일림산 일대에 연분홍 철쭉이 만발하면 그 풍경에 자지러지지 않는 사람이 없단다.
녹차 밭을 벗어나 되돌아오는 길에는 해풍에 한들거리는 청보릿대가 남도의 오후풍경을 선사한다.
"보성 녹차 마이마이 알려주더랑께요." 김매던 아낙의 활짝 웃는 얼굴이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더욱 정겹다.
▶보성다원 입장료:일반 1천600원, 학생과 65세이상 1천원.
◇ 여행 Tip
녹차의 고장 보성에 가면 다양한 녹차 음식들이 있다. 보성다원에서 멀리 않는 회천면 소재지에선 녹차를 이용한 칼국수, 수제비, 삼겹살 등을 파는 식당들이 많다.
또 보성군에서 직영하고 있는 율포해수욕장 옆 해수'녹차탕도 들러볼 만하다. 여행의 피로를 푸는데 효과적이다. 바다 밑 120m 암반을 뚫어 목욕물로 사용하는 해수'녹차탕은 항산화물질이 많아 피부탄력과 노화방지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탕에 들면 득량만 갯벌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해수.녹차탕 이용료:성인 3천500원, 어린이 2천원.
◇보성 다향제
녹차의 본고장 보성군은 오는 5월 4일부터 7일까지 나흘간 '제33회 보성다향제'를 연다. 차 문화 보급과 계승발전을 위해 개최되는 다향제는 매년 첫차(우전) 수확시기와 일림산 연분홍 철쭉이 만발하는 시기에 맞춰 차밭, 일림산, 대원사 및 보조 장소에서 개최된다. 특히 이번 다향제는 '2007년 세계녹차페스티벌'과 '2010년 세계녹차엑스포' 개최를 위한 준비축제로서의 의미도 크다.
첫날 다향의 밤을 시작으로 다신제, 차잎 따기 경연과 체험 등 문화행사가 뒤를 잇고 관광객의 축제 참여를 위해 녹차 만들기와 녹차잎 따기 등 6개 분야 70여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체험 관광은 축제 당일 현장에서 바로 접수하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참고 홈페이지:www.boseong.go.kr, dahyang.boseong.go.kr
◇보성 차밭 가는 길=구마고속도로 칠원 분기점에서 남해고속도로로 갈아 탄 뒤 순천TG에서 내린다. 순천 외곽 도로를 거쳐 계속 가면 벌교방향 2번국도와 연결된다. 이 국도를 이용해 이정표를 따라 목포'보성방향으로 가다보면 회천면 방향 '보성차밭'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여기서 약 20여분 가면 오른편에 대한다업(주) 보성다원 팻말을 볼 수 있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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