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은영 선수는 어디 계십니까?" "아, 제가 김은영인데요. 안녕하세요."
"예? 권투 선수 김은영 씨 맞나요?" "예, 저예요."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보이는 뿔테 안경에 뽀얀 얼굴. 160cm가 조금 넘는 자그마한 체구에 운동복 차림새. 평범한 아가씨로 보일 뿐 아무리 뜯어봐도 권투 선수라고 여겨지는 구석이 없다. 하지만 손에 붕대를 감고 링에 서자 눈초리가 매서워진다. 김은영(28·여·대구 대산권투체육관) 씨는 어엿한 세계여성프로복싱협회(IFBA) 밴텀급 세계챔피언이다. 대구 권투계에서는 남녀 통틀어 첫 세계 타이틀.
랭킹 2위였던 김 씨는 24일 충남 공주에서 열린 세계챔피언 결정전에서 후지모토 나츠기(랭킹 3위·일본)를 3대0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꺾고 정상에 섰다. 두 번째 도전만에 얻은 성과다. 지난해 11월 테리 크루즈(미국)에 도전했다 편파 판정으로 고배를 마셨다. 판정에 항의, 재시합이 결정됐으나 상대가 확인되지 않은 부상을 이유로 거부해 챔피언 자리를 내놓게 됐고 이 자리를 김 씨가 24일 경기를 통해 차지했다.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가끔 등장하긴 하지만 여자 권투 선수는 여전히 낯선 직업이다. 더구나 요즘은 권투의 인기 하락세가 뚜렷한 탓에 남자 선수조차 찾기 힘든 형편 아닌가. 하기야 김 씨 자신도 4년 전 체육관에 첫발을 들여놓을 때 권투를 직업으로 삼게 될지는 미처 몰랐다. 스스로 몸을 보호하고 건강도 챙기겠다는 생각에 글러브를 끼게 됐을 뿐.
수소문 끝에 체육관을 찾게 된 김 씨에게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권유한 이는 체육관장 이춘광 씨다. "처음엔 다이어트 삼아 다니겠거니 했죠. 그런데 재미를 붙였는지 이것저것 시키는 족족 이를 악물고 매달리더라고요. 성실하고 재능도 있어 보여 선수로 한번 뛰어보자고 했습니다."
새로운 경험이다 싶어 동의한 김 씨. 2004년 11월 대구시 동구 문화체육회관에서 맞은 데뷔전(4라운드 경기). 정신없이 치고받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링에서 내려왔을 때 든 생각은 하나. '재미있구나.' 이후 그는 7경기를 더 치렀고 한국·동양챔피언을 거쳐 마침내 세계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았다.
"데뷔전 때 사람들 앞에서 홀몸으로 서서 때리고 맞는데 기분이 묘했어요. 뭔가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이 맛에 권투를 하는구나 싶더군요. 아마 다른 권투 선수들에게 물어도 같은 답이 돌아올 걸요."
1남2녀 중 장녀인 김 씨는 경북예고 서양화과를 거쳐 계명문화대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미술학도. 디자인 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그녀가 붓 대신 권투 글러브를 잡았을 때 주위에서 찬성했을 리는 만무하다. 특히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지만 결국 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친구들도 만류하긴 마찬가지.
"친구들은 경기를 보기 전까지 권투를 한다는 사실을 안 믿더군요. 링에서 내려왔을 때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든 걸 보더니 놀라 아무 말도 못하데요. 아마 '판다'처럼 보였겠죠(웃음)? 친구 중 몇몇은 아직 그만두라고 합니다. 꼭 맞아야 하는 직업을 택해야 되느냐고 되물어요."
매일 아침 10km를 뛴다. 그 후에도 3시간 정도 연습을 더 한다. 시합 두 달 전부터는 체육관에서 먹고 자며 주먹을 가다듬는다. 운동량을 늘리기 위해 새벽까지 근무해야 하는 바텐더 일도 그만뒀다. 조주사 자격증을 따려고 했던 꿈 역시 접었다. 권투에 인생을 건 만큼 하루라도 운동을 소홀히 할 순 없다. 반복되는 운동으로 쌓이는 스트레스는 '실력이 늘었다.'는 칭찬 한 마디로 날려 버린다.
남자 친구? 없다. 친구들 중엔 이미 결혼한 이들도 여럿이지만 아직 남자친구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운동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란다. 챔피언 타이틀 방어전을 생각하며 몸을 만드는 데만 열중할 뿐. 좋은 배필감을 곧 구해주겠다는 이 관장의 말을 웃어넘긴다.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내일 일은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운동선수들이 그렇듯 언젠가 현역에서 물러나야 할 시점은 오는 법. 김 씨도 머릿속에 그려둔 꿈이 있다고 했다. "대학에서 운동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한 뒤 체육관을 열고 싶어요." 권투의 매력에 푹 빠진 그다운 대답이다.
우리나라에서 권투 선수가, 그것도 여자 권투 선수가 계속 링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지원이 마땅치 않아서다. 6월 대구에서 1차 방어전을 가질 예정인 김 씨도 챔피언으로 롱런을 하기 위해서는 스폰서가 필수적이다. 든든한 지원자가 나타나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다면 김 씨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는 한 점 그늘도 걷히지 않을까.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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