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개방의 아픔

위험부담 때문인가, 開放(개방)은 늘 불안했다. 특히 전통적으로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개방을 쉬 용납했을 리 없다. 그러나 개방을 향한 선각자들의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피 흘리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1637년 병자호란에서 굴욕적으로 항복한 仁祖(인조)는 소현세자, 봉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을 심양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당시 선진지였던 중국에서 서양문물에 심취하게 된다.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과 친교를 맺고 서양의 수학과 천문학을 접했다.

그러나 8년 뒤, 인질생활을 끝내고 귀국했을 때 인조와 대신들은 소현세자가 가져온 서양문물을 받아 들이려하지 않았다. 서양문물을 찬양하며 조선의 변화를 부르짖던 소현세자는 결국 귀국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三田渡(삼전도)의 굴욕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 근본 원인인데도 당시 집권세력은 여전히 변화와 개방을 거부한 것이다.

'닫힌 사회'에서 열린 세계를 추구하다 엄청난 대가를 치른 경우로 茶山(다산) 정약용 집안을 빼놓을 수 없다. 남을 헐뜯은 일도 없는데 단지 개방적인 사고와 행동을 취했다는 이유로 피바람을 맞았다. 다산의 막내 형 약종은 끝까지 천주교를 버리지 않아 1801년 사형당했다.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은 매형 이승훈은 시신에 턱뼈가 없을 정도로 심하게 고문당한 채 순교했다. 조카사위인 황사영은 능지처사 당했고 관련 식솔들은 노비가 되거나 섬으로 유배를 갔다. 겨우 목숨을 건진 둘째 형 약전과 다산도 흑산도와 강진으로 각각 유배된다. 이처럼 가슴을 열려다가 물고를 당한 史實(사실)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사회도 진화한다.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힘이 기존 세력보다 강하면 '혁명'으로 승화하지만 이보다 약하면 전자는 후자에 의해 몇 십배의 대가를 치러야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한미FTA가 타결되면서 우리는 또 하나의 빗장을 풀어야 한다. 찬반 양론이 분분하다. 그러나 조선시대처럼 한쪽의 일방적인 선택, 그리고 그에 따른 정치적 보복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아이도 자라면서 성장痛(통)을 겪는데 강대국과 담장을 허물고 같은 조건으로 살려면 어찌 아픔이 없겠는가. 그 고통을 줄이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윤주태 중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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