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학교, 성교육을 말한다)'솔직하지 않으면' 음지서 음란정보 의존

"안돼요" 가르치면 최소 몰라서 당하진 않아

학교 성교육을 말하다

'아빠 몸에는 정자라는 올챙이 모양의 씨가 있고 엄마 몸속에는 난자라는 아기씨가 있어요. 아빠와 엄마가 사랑을 나누며 두 씨가 만나서 아기가 생기고 엄마 뱃속에 있는 자궁이라는 아기집에 머물러 있다가….'

한 고교 2학년생이 중학교 때 본 성교육 비디오 내용이라며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이 학생은 "이 비디오를 보고 우리반 학생들이 보인 행동은 성교육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을 보충해 순진한 친구들에게 알려주는 일"이었다며 "학교 성교육은 청소년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꼬집었다.

▶학교, 성교육을 말한다

"아저씨 살려주세요!"

6일 오전 대구 월촌초교 6학년 교실. 노태수 보건 교사가 인형을 이용해 아동 성폭력의 위험을 설명하는 성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시작된 짧은 성교육극의 내용은 이랬다. '평소 잘 아는 이웃집 아저씨가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고 해 따라 나선 쫑이(여아 인형). 갑자기 골목길에 들어선 아저씨는 '가만 있어.' 하며 쫑이를 위협해 옷을 벗기는게 아닌가. 이제 아저씨는 자신의 바지까지 내리고….' 처음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던 아이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역력했다. 막 울음을 터뜨리려는 여자아이도 있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노 교사는 손에서 인형을 내려놓고 물었다. "자 여러분이 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빨리 도망가요 돼요.", "신고해야 돼요." 라는 대답이 일제히 돌아왔다. 아이들은 아직도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꼭 그렇게 생생한 장면을 연출해야 하느냐고 노 교사에게 묻자 "나이가 어릴수록 성교육은 알아듣기 쉽게 보여주듯이 진행해야 효과가 크다."고 강조했다. 1993년 보건교사로 교직에 첫발을 디딘 그는 6, 7년 전부터 학교 성교육의 필요성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관련 연수도 찾아서 참석하고 수업재료도 직접 만든다. 보다 생생한 수업을 위해 얼마전 AIDS협회가 주최한 행사에서 5천 원을 주고 목각으로 된 남자 성기 모형까지 구입했을 정도로 열성적이다.

"1~4학년은 성폭력 예방교육, 5·6학년은 성매매 예방교육을 주로 합니다. 가정에서는 이런 성교육을 하시기가 참 힘듭니다.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마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줘도 길을 가르쳐달라, 선생님이 다쳤으니 함께 가자는 식으로 말하면 속는 것이 아이들입니다. 착한 아이들일수록 더 피해자가 되기 쉽습니다."

학교 성교육은 성폭행·성추행 예방뿐 아니라 올바른 성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도 된다. 그래야만 상대방의 성을 억압하는 일, 성을 사고파는 일이 나쁜 짓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김명숙 월배중 보건교사는 "일부에선 학교 성교육이 오히려 호기심만 부추긴다고 하는데 이는 현실을 전혀 모르는 소리"라고 했다. 성인들이 우려하는 이상으로 학생들이 성에 대해 눈뜨는 시기가 빨라지고 노골적이 되고 있다는 것. 호기심이라는 표현은 이런 현실에서 애써 고개를 돌리려는 어른들의 생각일 뿐이다. 학교 성교육이 시급하게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김 교사는 "아이들이 가진 생각 중 가장 위험한 것은 성(性)의 문제를 성행위로 좁혀 이해하는 데 있다."며 "이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 학교 성교육의 목표"라고 말했다.

성교육은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교사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한 보건교사는 "초등학교 4학년 때나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성교육 시간에 가르치는 내용이 거의 같다는 것이 우리의 한계"라며 "무분별한 인터넷 음란 동영상물을 통해 비뚤어진 일부 학생들의 성관념을 바로잡아 주려면 학교 성교육은 보다 솔직해지고 체계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초등학생에게도 자위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어른들이 성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 두려워하면 아이들은 자꾸 음지에서 이런 정보를 찾게 된다. 학부모들은 특히 내 아이는 아직 잘 모른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아이들은 안전한가

성폭력 피해 아동들의 상담·치료를 담당하는 '해바라기 아동센터'(080-421-2119)에 따르면 이 센터가 대구에서 문을 연 2005년 105건(내방·전화 상담 포함)이던 상담 건수가 지난해 330건으로 늘어났다. 해바라기 센터는 여성가족부가 13세 미만 성폭행 피해 아동의 치료를 위해 서울, 광주, 대구 세 곳에 설립한 기관. 피해사실이 확인되면 상담과 치료가 모두 무료로 진행된다.

심보영 센터장은 "통계를 살펴보면 전체 피해 아동 중 90%가 여아이며, 이 중 초등학교 저학년이 전체의 60~80%를 차지하고 있다."며 "특히 지난해에 이어 미취학 아동의 상담 비율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점이 특기할 만한 추세"라고 설명했다.

가해자는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경우가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센터 이현정 사회복지사는 "나이든 사람이 예쁘다고 안아주면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아이들에게 잘못 심어진 상식"이라고 했다. 실제 이곳에 접수되는 피해 상담 중 상당수가 친척이나 이웃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유치원, 어린이집 등에서 또래끼리의 성추행 사고도 증가하는 추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부모에게 바로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는 아동에게 수영복으로 가리는 곳은 중요한 부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만지려고 하면 "안돼요, 싫어요."라고 얘기할 것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미취학 아동의 경우 부모는 아동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

심 센터장은 "아동기에 발생하는 성폭력 사고의 상당수가 부모나 관련 기관에 노출되지 않은 채 넘어간다. 따라서 무엇보다 예방하는 노력을 가장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학교에서 하는 성교육이 성폭력에 큰 효과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지만, 최소한 몰라서 당하는 경우는 줄일 수 있다. 성폭행이 반복되는 일도 막을 수 있다."고 중요성을 강조했다.

▶학교 성교육, 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성교육은 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현재 교육부는 학교마다 성희롱, 성매매, 양성 평등을 주제로 1년에 최소 3시간의 수업을 의무적으로 실시토록 하고 있으며, 연간 10시간의 성교육을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 교사들은 이런 식으로는 내실있는 성교육이 이뤄질 수 없다고 지적한다.

가장 큰 원인은 수업시간 확보의 어려움이다. 재량활동 시간에 해야 할 교과는 많은데 시간은 한정돼 있다 보니 성교육 수업은 그야말로 드문드문 진행된다.

대구의 모 아동상담기관에서 만난 초등학교 보건교사는 "보건교과가 정규과목이 되지 않고는 제대로 된 학교 성교육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학교 성교육의 대부분이 보건 교사에게 일임된 상황에서 교육부가 권장하는 10시간 중 절반도 못 채우는 게 현실입니다. 학교보건법령에도 '필요시에 할 수 있다.'고 돼 있을 뿐입니다." 권장 시간을 채우기 위해 교내 방송 수업으로 대체할 경우도 있다 보니 교육 효과가 떨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정이 이러니 연령과 학년에 맞는 체계적인 성교육은 더욱 기대하기 힘든 형편이다. 한 교사는 "정규교과가 아니다 보니 교육과정이란 게 없다. 예를 들어 4학년 때 기초를 가르쳤다면 5, 6학년 때는 더 심화된 내용을 다뤄야 하는데 이게 안 되니 학생들이 성교육 수업은 노는 시간, 따분한 시간으로 여긴다."고 했다.

성교육 관련 교육자료나 교구재도 마땅치 않다. 대부분 학교에서는 보건교사가 여기저기서 자료를 수집해 교안을 작성하는 정도다. 한 교사는 "형편이 이러니 사고가 터졌을 때 사회 각계에서 학교를 탓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작 교사도 내용을 잘 모르고 가르치는 일이 빚어지곤 한다."고 했다. 그러나 성교육을 포함한 보건과목의 독립 교과 추진은 수 년째 교과 간 세(勢)싸움에 밀려 표류 중이다.

한 중학교 교사는 "학교장은 성교육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도록 관심을 쏟고, 보건 교사에게는 관련 연수 기회를 주는 한편 전문가 초빙 강연을 갖도록 지원해야 한다."며 "특히 교육부 등에서는 추상적인 지침이 아니라 수업에 바로 쓸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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