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건국 후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3포(부산포·내이포·염포)를 개항하고 倭館(왜관)을 설치하여 교역과 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조선은 3포에 한하여 일본 무역선의 내왕을 허락하고 무역과 어로가 끝나면 60명에 한하여 거류민을 허가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조정의 명을 어기고 거류민의 수가 2천 명 이상으로 늘어나자 관리들도 이들을 압박하는 일이 생겨 상호간에 자주 충돌하는 일이 발생했다. 중종이 즉위하자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일본인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가하자 일본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3포의 일본인들은 대마도주의 원조를 얻어 5천 명으로 폭동을 일으킨 삼포왜란이 1510년(중종 5년) 발생했다. 이들은 부산포와 내이포에서 약탈·학살 등의 만행을 자행하고 웅천성·동래성까지 침공했으나 조선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징벌했다. 이 난으로 조선측은 군민 270여 명이 피살되고 민가 790여 호가 불탔으며 일본측은 배 5척이 격침되고 290여 명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삼포왜란으로 조선과 일본간의 교통이 중단되었으나 일본이 다시 수교할 것을 간청해 15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여 내이포만을 다시 개항했다.
▶1814년 나폴레옹, 엘바섬으로 귀양 ▶1991년 언론인 최석채 사망.
정보관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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