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조와 함께-이승은 作 '동백꽃 지다'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온 엽서 한 장

말은 다 지워지고 몇 점 얼룩만 남아

이른봄 그 섬에 닿기 전, 쌓여 있는 꽃잎의 시간.

벼랑을 치는 바람 섬 기슭에 머뭇대도

목숨의 등잔 하나 물고 선 너, 꽃이여

또 한 장 엽서를 띄운다, 지쳐 돌아온 그 봄에.

동백꽃은 그냥 피었다 지는 꽃 아니라, 지상에 왔다 가는 한 목숨입니다. 피어선 회심이요, 져서는 회한이지요. 동백꽃이 왔다 간 자리에 가 본 이라면, 송이째 뚝뚝 져서도 끝내 놓지 않는 핏빛 향기에 눈을 적셔 본 이라면 알 일입니다. 피든 지든 동백꽃은 사랑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 작품에는 두 장의 엽서가 나옵니다.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온 엽서와 지친 봄의 기슭에서 다시 띄우는 엽서. 두 장의 엽서 사이에 무수한 꽃잎의 시간이 쌓여 있습니다. 그 섬에 닿기 전, 진작 져 버린 꽃무덤 앞에 말은 다 지워지고 몇 점 얼룩만 남습니다. 그나 그뿐, 더 무엇을 헤집거나 걸터듬지 않는 데서 꽃빛도 물빛도 한결 깊어집니다.

벼랑을 치는 바람에도 꽃은 결코 목숨의 등잔을 꺼뜨리지 않습니다. 지쳐 돌아온 봄일망정 또 한 장의 엽서를 쓰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요. 절심함이 녹아 있는 대목은 늘 이렇듯 읽는 이로 하여금 하나씩의 괄호를 치게 만듭니다. 꽃 진 자리에 깃들이는 참 맑고 서늘한 잔상의 여운!

박기섭(시조시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