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세기의 추억] ⑭농촌 봄풍경

소달구지…쟁기질…산골서 만난 '아련한 향수'

농사철이 돌아왔다. 봄은 농사꾼에게 활력이자 인고의 계절이다. 거름 주고 땅 갈고 논두렁 만들고…. 농사만큼 손길이 많이 가는 것도 없다. FTA로 세상이 시끄럽지만 논밭을 세심하게 어루만지는 농부의 마음은 예전과 다를바 없었다.

◆농사는 정성=고령군 성산면에서 만난 김성규(78) 할아버지. 그는 논에 거름을 뿌리다 취재진을 보자 허리를 폈다. "농사는 정성이 제일 중요해. 부지런한 게 최고지." 그는 공무원 생활을 하다 퇴직 후 귀향해 10여 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비료만 주면 미질이 떨어져 맛이 없지. 거름을 얼마나 자주 주는지가 중요해. 형제, 자식 집에 쌀을 보내주는데 다른 쌀은 거들떠보지도 않아."

거름은 겨우내 마구간에 넣어둔 짚과 소똥을 발효해 만든다. 양이 부족하면 톱밥, 왕겨 등을 더하고 수시로 오줌을 뿌려준다. 자연식 비료다. 곳곳에서 작은 산만한 거름 무더기를 옮기는 장면이 보인다. 그러나 최근 농촌인구가 고령화되면서 비료만으로 농사를 짓는 농가도 많다고 한다. 한 할아버지는 "모두 나이가 들면서 힘든 일을 감당하지 못해 '대충대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소가 쟁기를 끌다=소로 땅을 가는 농가가 있을까? 경운기, 트랙터가 보편화된 지 오래지만 아직도 소를 이용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수소문 끝에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에서 강길원(73)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고추 모종을 앞두고 집앞 밭 900평을 갈아야 한다고 했다. 부인 김청자(69) 할머니가 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요즘 소로 땅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트랙터에 맡기면 되지." "돈이 얼마나 드는데. 농사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 할아버지는 트랙터로 땅을 갈면 10만 원이나 줘야 하는데 그렇게 낭비할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노부부는 사소한 언쟁을 벌였지만 결국 할아버지는 소를 몰고 밭으로 향했다. 할아버지가 쟁기를 끌고 할머니가 고삐를 잡았다. 몇 고랑이나 갈았을까. 소가 긴 혀를 내놓고 헐떡였고 질매('멍에'의 경상도 사투리로 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 얹은 등에는 피부가 살짝 까져 있었다. "이 소로 5년째 땅을 갈고 있는데 아직도 앞에서 고삐를 잡아주지 않으면 안돼. 송아지 때부터 쟁기를 끌 수 있도록 길을 들여야 하는데 이제는 그런 소를 찾기 어려워." 트랙터로 갈면 몇 시간이면 되지만 쟁기로는 하루 이상 걸린다고 한다. 과연 무엇이 맞는 걸까.

◆소 달구지는 '자가용'=영주시 장수면 갈산리에 소 달구지를 모는 부부가 있다. 이성출(81) 할아버지는 고삐를 잡았고 최재임(77) 할머니는 달구지에 걸터앉았다. '이랴' 하는 소리에 소가 걷기 시작했고 '워, 워'하는 소리에 소는 멈췄다. 동네사람들은 이 노부부를 '금술 좋은 부부'라고 했다. 매일 할아버지가 달구지에 할머니와 농기구를 싣고 밭으로 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 달구지를 끈 지 50년도 넘었지. 이 소는 5년 전에 샀는데 이제는 길도 잘 알아. 집을 나서면 밭으로 향하고 밭에서는 집쪽으로 달리지." 할아버지는 '소 달구지가 우리 자가용'이라고 했다. 소 달구지가 달리기 시작하면 어른 뜀박질로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속력이 났다. 할아버지는 좋지 않은 길에서는 고삐를 쥐지만 도로에서는 할머니와 함께 타고 달렸다.

고령군 개진면 구곡리의 권남수(74) 할아버지도 소 달구지를 끌고 다닌다. 그는 경운기보다는 소 달구지가 훨씬 애착이 간다고 했다. "달구지에 거름도 싣고 농작물도 싣고 다니지. 소가 말을 잘들어. 말 안듣다간 (두들겨) 맞으니까." 그렇게 농촌의 봄은 시작되고 있었다.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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