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민심대장정 중인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김지하 시인이 찾았다. 손 전 지사의 정치적 진로가 화제에 올랐다. "여야 모두 살길이라 말하는 중도의 길이 어떤가요" 김 시인이 넌지시 떠봤다. "중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곡예를 하자는 것 아닙니까" 손 전 지사는 한마디로 잘랐다. 중도는 기회주의이고, 개발'독재시대 반독재 투쟁의 부산물인 '사쿠라'와 다름없다고 부연했다. 1970년대 제1야당을 이끌던 이철승 씨의 중도통합론이 머리에 박혀 있는 듯했다. 이 씨가 주장한 중도통합은 유신독재에 대한 투쟁일변도의 '선명 야당'을 떠나서 '협력과 견제'로 선회하자는 것이었다. 즉각 사쿠라 논쟁에 휘말렸고, 이 씨는 외면당했다. 손 전 지사는 대신 통합을 정치적 화두로 제시했다. 그랬던 그가 한나라당을 뛰쳐나가면서 외친 것은 중도통합이었다.
너도나도 중도다. 민주당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열린우리당 탈당파 및 국민중심당과 함께 이번주 구성하려는 교섭단체 추진기구도 '중도개혁통합신당협의회'다. 이명박 박근혜 두 대선 주자도 합창하듯 중도를 외치고 있다. 한나라당이 중도로 더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중도 沙汰(사태)가 날 지경이다. 이러다가는 모든 정파가 한 무리로 만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모두 표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의 이념과잉에서 반사적 환심을 사려는 계산들이다. 사실 언뜻 듣기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유연한 뉘앙스의 중도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지만 뜯어보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정치적 노선 변화를 논리적으로 납득시키고 있지 않다. 어느 쪽은 '좌파 꼴통'의 이미지를, 다른 쪽은 '수구 꼴통'을 가리기 위해 어정쩡하게 분칠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디 중도는 양극단의 산술적 평균이 아니라고 한다. 보수와 진보가 적당히 버무려진 중간지대가 아닌 것이다. 시대정신에 따라 더 가치가 있는 쪽에서 맞추어지는 균형점이 중도다. 어느 시대에는 보수가, 또 어떤 때는 진보가 더 비중 있게 위치하며 서로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지금 정치판처럼 특정 정치세력을 뺀, 이를테면 '非(비) 노무현 反(반) 한나라' 노선이 중도라고 외쳐대고 다니는 것은 허튼소리다. 어느 정당도 이념적 정체성이 모호한 상황에서 중도는 울림이 없다. 오히려 정당 색깔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한국정치 앞날을 위해서 바람직할 것 같다.
김성규 논설위원 woosa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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