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상처가 예술을 낳는다] ⑦시인 이동순

어미 없는 새끼 그 원초적 그리움

'…/ 지금 이 나라의 산수유꽃으로 피어나서/ 그 향내 바람에 실려와 잠든 나를 깨우니/ 출아 출아 내 늬가 보고접어 못 견디겠다'(시 '서흥김씨 내간')

시인 이동순(57). 그의 시는 모태와 모성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서흥김씨 내간'도 죽은 어머니가 아들 '출이'를 보고싶어 하는 시다. 여기서 '출이'는 이 시인의 아명(兒名)이다. 그리고 '보고접어 못 견디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출이'다.

봄비가 주적주적 내리는 날. 대구시 수성구의 한 음식점에서 그를 만났다. 이 시인은 우리 가요 300곡을 가사 안 보고 3절까지 부르는 이로 유명하다. "어릴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백설희 황금심의 목소리가 왜 그리 좋은지.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푸근했어요."

그러나 그는 어머니(김기봉)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얼굴도 모른다. 태어난 지 10개월인 1951년 늦봄 세상을 떠났다. "산후조리도 못하고 돌아가셨죠." 인민군이 밀려와 산골 나실리로 피신해 낳았다고 아명을 '나출'이라고 불렀다.

어릴 적 고향에 가면 "니가 나출이가. 에그 죽었을 니가 살았구나."라는 동네 아줌마들이 많았다. 대부분 그에게 동냥젖을 먹인 아낙들이다. "어머니가 없는 것이 왜 그리 섧던지." 오동나무가 서걱대도 눈물이 났다고 했다.

더 기구한 것은 계모였다. 모두 세 명을 거쳤다. "처음 들어온 계모는 아편중독자였어요." 약기운이 떨어지면 손찌검을 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를 깨 피가 철철 나기도 했다. 이웃집 친구 어머니가 된장을 발라주는데 머리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 다섯 살 아이의 설움 치곤 지독한 경험이다.

두 번째 계모는 초등 1년 때 들어왔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웃의 돈을 빌리고, 아버지 쌈짓돈까지 훔쳐 달아났다. 세 번째는 차갑기 그지없는 계모였다. '울밑에 귀뚜라미 울던 달밤에 기럭기럭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가도 끝없는 하늘에 엄마엄마 부르며 날아갑니다.'

동요를 부르며 애타게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어디를 봐도 어머니의 흔적은 없었다. 그 흔한 사진 한 장 없었다. 그때 진공관 라디오에서 어머니 소리가 들렸다. "백년설의 '어머님 사랑', 남인수의 '어머님 안심하소서' 같은 노래들이 얼마나 좋은지 공책에 가사를 적어 따라 불렀습니다."

노래는 어린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자 안식처였다. 계모로 인한 고달픔을 잠시 잊게 했다. 얼마나 구슬프게 불렀던지 동네사람들도 눈물을 찍을 정도였다. 영화 '엄마없는 하늘아래'나 이윤복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 '쌍무지개 뜨는 언덕' 같은 영화를 보면 눈이 퉁퉁 부어 나왔다.

초등 4,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김성도의 동화책 '달뜨는 마을'을 소개해 줬다. 없는 형편에 우여곡절 끝에 책을 샀다. 책에 이름 '이동순'을 쓸 때 가장 기뻤다고 한다. "처음으로 갖는 내 재산이었어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문예반에서 활동하고, 고등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글은 모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해지는 골목에서 '아무개야 저녁 먹어라.'라고 하는데 나는 부를 사람이 없다는 그런 이야기들이었죠." 어머니의 사랑을 맛보지 못한 그의 소년, 청년기는 가혹한 시련의 시기였다. 간혹 일찍 간 어머니를 원망하며, 한탄하고, 또 울분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가 두 발을 딛고 살게 했습니다. 상처는 슬퍼만 한다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일찍 간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흔 넘어 그는 그 상처의 꺼풀을 벗겨냈다. "어머니 없는 상처는 나 혼자만의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굴곡 많은 현대사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공통된 표정이나 내면이 아닐까요."

한 깨달음을 얻었다. "바람도 새도, 구름도 땅도 모두 어머니인 것이죠." 이때부터 그는 소외된 그리고 남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들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첫 시집 '개밥풀'의 서시는 '죽음도 결국은 슬퍼할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시집을 내고 나니 후련했습니다. 애잔하면서도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의 밑그림에는 늘 어머니가 있었다. 마치 지하수처럼 그의 삶 전체를 흐르는 정서다. "이젠 그것도 슬픔이 아닙니다. 어머니 찾기는 나의 진정한 모습을 찾는 것이죠."

그의 마음 한 편에 소원이 있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등에 업힌 어머니가 너무 가벼워 세 발짝을 채 못 걷고 발등에 눈물을 떨구었다는 시를 쓴 적이 있다. "나도 이시카와처럼 어머니를 등에 한번 업어봤으면…."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1950년 경북 김천 상좌원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미스 사이공' 등 12권 발행. 해방 이후 최초로 '백석시전집'을 발간해 시인 백석을 문학사에 복원시켰다. 민족서사시 '홍범도'(전 5부작 10권) 등 각종 저서 40권 발행. 신동엽창작기금, 난고문학상, 시와시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영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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