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송 백자] ①어떤 도자기인가(상)

돌덩이 재료로 계란 껍질처럼 얇게 빚는다

청송군 부동면 신점리에 위치한 법수광산의 도석은 진주·양구 등지의 백토와는 달리 돌덩어리 형태로 채굴된다. 분쇄된 가루는 황백색에서 순백색을 띤다. 밀가루같이 빻아 부드러워진 흙은 그릇을 종잇장처럼 얇게 빚을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청송 백자를 두고 '계란껍질처럼 얇아서 깨어질까봐 지게에 지고 징검다리도 못 건넌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법수도석은 그릇의 모양을 만들고 변형시키기에 용이한 만큼 성형(成形)에 있어서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또 이곳의 도석은 다른 흙을 섞지 않고 단일재료만으로도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자연이 만들어낸 '조합 도석'이기도 하다. 그러나 법수도석만으로 구우면 퍼석퍼석해서 잘 깨어지고, 점력(粘力)이 강해 쉽게 주저앉기 때문에 '보래'나 '무른질'이라는 광물질을 섞어 사용했다.

초기에는 점력이 강해 차진 보래를 영일군 죽장면에서 가져와서 섞었으나 차차 법수광산 부근에서 나는 '무른질'이라는 부재료를 12대 1의 비율로 섞어서 사용했다. 이런 단점 때문에 청송 백자는 초기부터 다섯 되 들이가 넘는 기물은 만들 수 없었다.

돌덩이 모양의 도석은 법수광산에서 캐내 지게나 소등짐으로 옮겨와 정(丁)이나 망치로 직경 10~15cm 크기로 깨트린 다음 디딜방아나 부남면 웃화장 공방에서와 같이 물레방아를 이용해 곱게 분쇄해 사용했다. 디딜방아의 경우 4명이 짝을 이뤄 찧게 되는데 제작 과정에서 가장 힘든 작업이기도 하다.

문경 자기나 합천 자기에 비해 도석을 빻아 만든 청송 백자는 원료를 마련하는데 노력이 많이 드는 만큼 흙을 소중하게 다루게 되었다. 최소량의 원료로 그릇을 빚어야 했기 때문에 시대의 변천에 따라 기벽(器壁)이 얇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곱게 분쇄한 도토(陶土)를 물에 풀어 가라앉혀 반죽형태로 만드는 수비(水飛)작업은 다른 지역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수비한 도토, 즉 '질'을 건조하는 방법은 급속 건조해도 흙의 성질이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문경·합천 등과는 달리 사기움막 안 '봉내방'이라 불리는 온돌 위에 널어 말렸다.

그릇을 빚을 때도 청송백자는 소품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도구들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전통 발물레 위에 준비된 도토를 올려 손으로 형태를 잡고 '젓갖'이란 가죽띠로 마무리한 다음 '쨀줄'이라는 명주실 칼로 끊어내면 그만이었다.

청송 백자 연구로 안동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강병극(51·청송군청 문화재과) 씨는 "일반 서민들이 주로 쓰는 민요(民窯) 자기가 그렇듯 최대한 시간을 절약해 많은 그릇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인근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물레를 차는 숙련된 사기대장은 접시 하나 빚는 데 5초 정도면 충분했다."고 말했다.

가끔씩 보이는 다소 큰 기물이나 병의 경우는 물론 제작과정이 보다 까다로웠다. 도토의 점력이 강하기 때문에 큰 기물은 주저앉기 쉬워 상하 2등분해서 만든 다음 접합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때 다른 지역에서는 성형(成形)을 한 다음 그릇 상하를 접합해 굽을 깎는 작업을 하는데 비해 청송사기는 굽깎기와 건조를 마친 후 접합하는 것이 특이했다. 법수광산의 고령토는 약간의 물기에도 쉽게 붙일 수 있는데, 굽깎기 후 접합은 그만큼 작업 능률을 높일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또 하나 성형에 있어서의 특징은 그릇의 기본형을 '양파 모양'으로 통일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양파 모양의 단지에 목을 붙이면 병이 되고 마찬가지로 접시에 굽을 달면 제기 잔대가 되었다.

이와 관련, 강병극 씨는 "그릇을 만드는 데 있어 복잡하거나 여러 가지 형태로 하면 작업 능률이 떨어지는 만큼 하나의 표준형을 정해 짧은 시간에 많은 기물을 만들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청송 백자는 그릇이 얇기 때문에 건조 속도가 빨라 성형을 하고 10시간 정도 지난 당일 굽깎기를 했다. 초기의 제기들은 8각(角)의 '모깎기'를 하거나 둥근 굽으로 깎았으나 말기로 내려오면서 점차 둥근 굽깎기로 작업효율을 높였다.

대접은 17세기에는 다른 지방 가마와 같이 대마디 모양의 굽이었으나 18, 19세기를 거치면서 오목굽, 20세기에 들어서는 낮은 굽으로 변했다. 특히 종지나 작은 접시의 경우 말기에는 아예 굽을 깎지 않은 것도 있는 것으로 확인돼 철저하게 실용성을 추구한 서민용 도자기였음을 읽을 수 있다.

전충진·김경돈·조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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