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모니터 킨트의 행복한 생애를 위하여

전혜린은 그의 수필에서 자신을 '아스팔트 킨트'라고 썼다. 킨트(kind)는 어린이를 가리키는 독일어. 흙을 밟지 않고 아스팔트와 빌딩의 숲 속에서 자라나는 도시 아이들을 말한다. 60년대 중반 서른둘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의 글 속에 이런 용어가 등장하는 것은 의외다. 그러나 그녀가 뮌헨대학에서 독일문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아스팔트는 빌딩과 함께 고향의 부재, 자연에 대한 상실감, 인간 관계의 해체와 같은 도시적 감수성의 알레고리로서, 60년대 우리의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러나 전혜린 이후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 용어는 익숙해진 지 오래며,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이제 '모니터 킨트'라는 말이 자연스러워진 시대가 되었다.

아스팔트 킨트가 아날로그를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의 산물이라면, 모니터 킨트는 디지털을 중심으로 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산물이다. 둘다 자연과 사람에서 멀어지면서 서서히 고립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모니터 킨트의 심각성은 도시는 물론 농어촌까지, 어린이와 청소년은 물론 청장년까지 전면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한 통계는 현재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컴퓨터를 접하는 평균 연령은 만 4세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야동을 접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진화로 놀라우리만치 편리해진(?) 일상의 뒤편에 너무 깊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게 보인다. 인터넷과 휴대전화, 유비쿼터스는 좀 편리한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인생의 영원한 텍스트는 자연과 인간이라고 볼 때, 정보화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우리의 모니터 패러다임은 반성의 차원을 넘어서 대담한 궤도 수정이 필요하다. 특히 성숙된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어린이일수록 모니터와 마주하는 시간을 줄이고 흙과 자연을 응시하고, 가족과 친구를 마주하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

반 세기 전 전혜린의 자살이 아스팔트 킨트의 비극적 선택이라면, 며칠 전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총기 사고는 모니터 킨트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땅의 수많은 모니터 킨트들의 행복한 생애를 위해서는 우선 그들 앞에 놓여 있는 모니터를 걷어내야 한다. 세련된 방법으로 대담하게 걷어내면서, 모니터를 넘어 자연과 사람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일차적으로 이 일을 감당해야 할 주체는 가정과 학교라고 생각한다.

김선굉(시인·의성 단밀중 교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