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옐친

타계한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에 의해 모스크바 당 제1서기와 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발탁됐다. 지방에서 정치적 야심을 키워가던 옐친에겐 화려한 중앙 무대 진출이었다.

옐친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공산당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등 당내 야당 노릇을 하면서 보수 세력의 견제와 배척을 받는 대신 대중적인 지지를 확대해 나갔다. 그는 급진 개혁론을 더욱 강화해서 1990년 5월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소련 대통령은 고르바초프. 고르바초프 역시 고향의 공산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 당 중앙위원이 됐다. 1980년 정치국원으로 권력의 핵심에 접근한 그는 1985년 3월 체르넨코가 사망하자 당서기장에 올랐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주도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련의 변화와 동구의 민주화 등 현대사의 물줄기를 뒤바꾼 원천이다. 옐친의 급진 개혁 주장 또한 고르바초프의 토양에서 가능했다. 고르바초프가 소련 최초이자 마지막 대통령이 된 것이 1990년 3월. 그 두 달 후 옐친이 소 연방내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연방 대통령과 연방 내 거대 자치공화국 대통령은 세계사에서 가장 거대한 변화를 이끄는데 있어서 속도와 방법의 차이는 있었으나 동지였고 선후배였다. 그러나 정치는 굳이 승패를 가르려 한다.

1991년 8월 21일이 분수령이 됐다. 보수 강경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연금하고 옐친을 체포하러 나섰다. 옐친은 자신을 체포하러 출동한 탱크 위에 올라가 쿠데타 무효를 선언하는 열변을 토했다. 옐친은 민주화를 향한 새 시대의 영웅이 되면서 고르바초프는 몰락한다. 페레스트로이카만 해도 엄청난 개혁이었으나 그 보다 더한 거침없는 개혁에 짓밟힌 셈이다.

옐친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세계사와 세계인, 러시아사와 러시아인의 평가가 다르다. 특히 모라토리움까지 가는 실정으로 초강대국 소련을 소국으로 전락시켰다는 비아냥까지 받았다. 한국 방문 때 탈렌트 이영하와 보드카를 밤새 마시는 등 술을 좋아해 술 주정뱅이라는 비판을 달고 살았다. 옐친이 잘한 일이라곤 후계자를 잘 선택한 것 하나밖에 없다는 혹평도 있다. 대선을 앞둔 한국도 참고할 말이다.

김재열 논설위원 soland@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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