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법의 권위

산업화 시대를 건너 정보화 시대에 와 있는 우리는 현재 약 4천 개가 넘는 법률과 수많은 조례와 규칙들 속에서 살고 있고 또한 거의 매일 같이 새로운 시대상황을 규율하는 새로운 법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법률 속에서 살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늘 무질서를 느끼고 있고 혼란을 경험하고 있으면서 뭔가 강력한 법의 등장을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이유를 법의 권위가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법의 권위가 사라졌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와 다양화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권위주의 방식의 통치 스타일이 민주적, 사회 참여적 방식으로 바뀌게 되면서 사회 각 분야의 권위주의적인 방식이 거의 사라졌다고 할 것인데, 그와 동시에 국가 운영의 기본 틀인 법의 권위까지 함께 사라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사라진 듯한 무질서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권위가 무너진 법은 어떤 모습이 되는 것인가?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Auctoritas, non veritas facit legem)'라는 로마법의 법언이 있다. 이미 합의를 보아 법으로 규정해 놓은 것을 두고 사후에 진리나 정의를 근거로 법의 효력을 부인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오직 권위만이 법의 효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은 본질적으로 권위체계이다. 법이 곧 정의여서라기보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공평할 때 얻는 열매가 바로 권위이기 때문이다. 그 권위가 살아 있으면 악법도 법이냐라고 외치면서 그 피해를 주장하기까지 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권위가 무너지면 정당한 법조차 이미 법이 아니게 된다. 법이 법이 아닌 곳에서는 사람이 법이 되고, 법을 집행하는 기준이 다르고 법을 판단하는 눈높이가 다르면 법을 쥔 사람이 바로 정의가 되고, 권력과 제도적인 힘인 다수가 정의가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국가는 법률에 의한 법치국가이다. 인간사회는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갈파한 것처럼 '사회적 동물'이어서 홀로 생존할 수는 없는 존재이기에 모여 살면서 짐승과 같은 약육강식의 다툼을 벌여왔다. 결국 다른 사람보다 강력한 완력이나 무력을 가진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지만, 지배자는 힘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군림하기보다 점점 무력을 순화시키고 이성에 호소하는 방법을 생각한 그 수단이 법인 것이다. 그러나 법은 지배를 당하는 자들에 의한 승인을 받을 때에 비로소 가치와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지, 오로지 소수자의 지배수단으로서만 기능할 때에는 권위를 상실하고 저항을 받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민주화의 만개 속에서 안정감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청산한 이념적 대립 양상을 재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별로 집단적 대립과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는 새로운 21세기의 변화와는 거리가 먼 퇴행적인 모습이다. 이는 일부 논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수구세력이 개혁에 저항하기 때문도 아니고 변화의 흐름을 주도하지 못하는 정치 때문만도 아니며,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 되풀이되는 여야의 대립 때문만도 아니다. 바로 법치의 근간이 흔들리기 때문이고 사회정의가 법정신에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법질서가 사회 안전판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질서의 회복을 위해서는 결국 사회적인 대타협을 통하여 갈등을 해소하고 실추된 법의 권위를 회복하여 국민 모두 법의 권위 앞에 복종하는 법치국가를 이루는 길 이외 다른 방법이 없다. 이를 위해서는 법률종사자들의 공정한 법집행을 통한 신뢰회복과 국민 스스로 우리가 승인한 법을 스스로 지킨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법의 날을 맞이하여 법의 권위가 회복되어 실질적 법치주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홍이표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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