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 시간, 공간, 그리고 봄의 보헤미안

혹 여러분은 잠시 잠간 사이 공간만을 덩그렇게 남겨 놓은 채, 시간을 싣고 휑하니 사라져 버린 버스를 본 적 있는가? 이제 그곳은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공간으로, 긴 줄로 서있던 사람들의 희미한 잔영만이 어른거릴 뿐, 먼 산만이 서로 겹쳐지고, 긴 줄로 서서 버스를 기다리며 서있던 사람들과, 그들이 공유하던 시간도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정적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가벼운 바람이 불어오는 버스정류장, 빈 공간에는 정적만이 남아있고 시간이 갑자기 증발해 버린 것 같다. 어디로 갔을까?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그들과 그들이 가진 시간, 나는 조금 전 과연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그들과 나누고 있었던가?

달포 전, 막 봄이 시작되던 3월, 그동안 오랜 생활의 터전이던 경주를 떠나, 이곳 현대 기아 자동차 기술연구소가 있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으로 떠나오게 되었다. 아침 출근길을 늘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이렇게 낯선 풍경의 공간만을 훌쩍 남기고 사라져 버리는 버스로 인하여 조금은 공상적인 생각을 하게도 되었다.

나는 이방인처럼 이곳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게 되는 버릇이 생겼고, 공간을 관찰하는 일 또한 많아졌다. 우리에게 각각 주어진 하루의 시간, 그동안 내가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꽃은 피고 또 지고, 결과를 남기고 사라져 버린 자연현상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많아지고, 그간 살아온 남쪽 고향의 계절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 되었다.

그 생각 중의 하나로 내가 고향에서 가져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간이고, 남겨놓고 온 것은 시간이다. 그리고 그동안 나와 생활을 같이해온 사람들이 내가 떠나옴으로 인하여 얻은 것은 내가 가져온 공간이요, 잃은 것은 내가 남기고온 시간이라는 역설적인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 명제는 성립될 수 있는 참 명제일까?

이 명제의 증명을 하기 위해 이천 사백 년을 거슬러 피타고라스를 만나 보는 것은 어떨까. 왜 피타고라스는 해를 구하기 위해 그의 수학적 정리과정에서 가만히 있는 도형의 변의 길이를 까닭 없이 배로 늘려야만 했을까. 그 해를 구하기 위한 과정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준 영감, 혹은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자연 현상의 모든 본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시작과 끝, 양면성을 가진 존재하는 모든 현상계와 무상계가 아닐까라고. 끝없이 거대한 것처럼 보이는 우주와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에 존재하는 더없이 작은 것들, 그리고 빛과 어둠, 절망과 희망, 그리고 제곱근에 관한 수학적 계산법과 무리수로 이어지는 수학적 발견으로 가능해졌던 놀랄 만한 아름다운 대칭성이었을 것이다. 부정의 부정은 강한 긍정을 나타내는 인간 감정의 근본적인 은유에서 그 해를 찾았다는 확신 또한 지울 수가 없다.

사람이 온전하게 지구 위에서 서 있기 위해서는 그림자가 있어야 한다. 서 있다는 것은 인간의 특징 중의 하나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사람 人(인)이라는 한자어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인 겹침도 있어야 하겠지만, 더 나아가 우주의 길이로 늘어나는 서로의 그림자 또한 겹침이라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만 할 것이다.

나의 그림자를 이어오는 수많은 시간 속의 내가 45억 년을 이 지구에서 순환하여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져온 한 장의 그림 같은 공간으로는 영원한 파경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또한 해가 아닐까?

그래서 역은 항상 역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시간 속에 또한 우리들의 시간이 겹치면 추억이 살아나듯, 지금 울고 있는 자 많이 울게 하고, 지금 이별하는 자 이별 하게 하고, 꽃 피고 꽃 지는 일이 아무 일 없으면 아무 일 없게 보는 것 또한 낯선 곳에서 느낄 수 있는 보헤미안적인 생각이라면 이 봄을 조금은 수월히 보낼 수 있을 것이 아닐까.

이화우(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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