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사랑이란 불안 때문에 더 강렬해지는건 아닐까? 정신분석학자인 지젝은 "불안이란 대상이 너무 멀리 있어서가 아니라 되려 가까워지는 데서 생기는 감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구나에게 한 번 쯤 이런 경험은 있을 법 하다. 너무나 좋아해서 몇 년 간 짝사랑했던 여자가 있다.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 순간만을 기다렸던 남자지만 막상 여자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줄 순간이 다가오자 갑자기 망설이기 시작한다. 혹여 그녀가 내 환상과 어긋난 사람이면 어쩌나, 혹시 그녀와의 사랑이 파멸로 귀결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불안은 사랑이 너무 멀리 있을 때보다 가까이 올수록 그 거리에 반비례해 증폭되고 만다. 순간 갈망은 불안으로 그 얼굴을 슬쩍 바꿔 영혼을 잠식해 들어간다.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치는 여자'를 원작으로 삼고 있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에리카'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노벨상 수상으로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실상 이 작품은 좀처럼 보기 힘든 여성 캐릭터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영화는 구깃구깃 옷을 숨겨온 딸의 가방을 뒤지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어머니는 일 년이면 쓰레기가 될 유행에 돈을 쏟아 붓는 다며 딸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화를 낸다. 흥미로운 것은 딸의 반응이다. 마치 부부싸움을 하듯 에리카는 어머니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입힌다. 누가 봐도 이들 모녀는 보편적이지도 그렇다고 정상적이지도 않다.
목까지 채워 올린 갑옷같은 의상 속에 갇힌 여자 에리카, 냉정하면서도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연기하는 이자벨 위페르는 소설 속 인물 '에리카'가 걸어 나온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아버지가 없는 집 안에서 어머니의 과잉된 애정과 기대를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딸에게 사랑은 가장 먼저 버려야할 사치품 중 하나로 취급된다. '사랑'은 감정의 과잉이며 엄마로부터 딸을 빼앗아갈 치명적 유혹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누에고치처럼 자기 속에 갇혀있는 이 여자에게 열렬한 숭배자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제자인 청년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간증하며 제발 자신을 사랑해달라 애원한다. 청년의 열정에 무심했던 에리카는 어느 순간, 비어 있던 감정의 한 부분과 마주치고 만다. 사랑. 그건 사랑에 대한 갈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릇 사랑 역시도 훈련이 필요한 학습이 아니었던가? 자신에 갇혀 왜곡된 방식의 사랑을 가꿔왔던 에리카는 이상한 요구들로 가득 찬 편지를 진심보다 먼저 전달한다. "나를 묶어 놓고 때려줘, 어머니를 가둬줘, 아니 힘껏 내 배를 걷어찬 후 사랑해줘." 안타깝게도 에리카는 그와는 다른 언어로 사랑을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사랑을 해보기 전에 언어를 잃어버린 에리카, 그녀는 자신에게 진짜 사랑이 올 지도 모른다는 환희를 불안으로 뒤집어 놓고 만다. 오염된 그녀의 영혼은 끝내 진정한 사랑과 접촉하지 못하고 좌절되고 만다. 충격적이면서도 강렬한 영화 '피아니스트', 결국 사랑이란 다른 언어를 지닌 타자와의 '대화'이며 불안의 공유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아프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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