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우리 동네 할머니들

팍팍한 세월 탓인지, 달라진 세태 때문인지 맞벌이 부부가 점차 늘어만 간다. 덕분에 어린 손자 손녀의 손을 잡고서 병원을 찾아오시는 할머니들을 자주 맞게 된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동네 소아과 의사 10년이면 저절로 반풍수쯤은 된 것 같다.

각양각색의 할머니들과 어울리다 보면 열에 아홉은 그 내력을, 적어도 친할머니인지 외할머니인지 정도는 제법 짐작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우선 병원 문을 들어서는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뭔가 바쁘다는 표정에 위풍당당한 자세로 아이들을 몰다시피하며 들어오시는 쪽이 친할머니라면, 왠지 불안한 얼굴에 다 큰 놈을 업거나 안고 전전긍긍하시는 쪽이 외할머니일 가능성이 많다.

진찰실에서의 풍경 또한 그만큼이나 다르다. 한쪽에서는 며느리가 나가서 일을 하면 얼마나 한다고, 제 새끼 뒤치다꺼리까지 도맡아야 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부아가 은근슬쩍 목소리에 배어나온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러잖아도 제 새끼 떼어 놓고서 일터로 나가는 딸내미의 뒷모습이 눈에 밟혀 짠한데, 한시라도 빨리 표시나지 않게 탈난 흔적을 지우려는 조바심이 진득하니 묻어난다. 치료에 대한 반응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잖아도 몸도 마음도 바쁜데 시원찮은 약발 탓에 병세가 여전하다는 볼멘 목소리의 주인공이 친할머니라면, 지켜본다고 보았는데도 몰래 아이스크림을 먹게 한 탓에 그만 기침이 더해졌다고 주눅이 든 목소리는 당연 외할머니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가슴앓이하면서도 짐짓 겉으로 큰소리치시든, 겉으로 눈물짓고 속으로 강단지시든 우리네 할머니들의 손자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유별나다. 세상에 내리사랑만한 치사랑은 없다고, 겉과 속이야 어떠하든 할머니들의 가슴 속에는 하나같이 눈물겨운 사연이 있다. 젊어서 당연히 시집살이를 살았고, 늙어서는 며느리살이를 해야 하는 안팎곱사등이 신세라는 옥이 할매 말씀에 맞장구치고. 아무리 용을 써도 생색나지 않는 것이 아이 뒷바라지라, 열 번 잘 하다가도 한 번 탈이 나면 당장 불똥이 떨어진다는 철이 할매 한숨소리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손자 손톱 밑에 가시 드는 줄은 알아도 당신 염통 밑에 쉬스는 줄은 모른다고, 굽은 허리에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다 큰 손자 녀석 콧물 닦아주느라 정신이 없으신 석이 할매에게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저출산 대책이니 뭐니 하면서 나발 불고 설레발치는 돈만으로도 반듯한 탁아소 몇 개는 너끈히 세우겠다는, 아직은 새파랗게 젊은 진이 할매의 시퍼런 비분강개에도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나는 오늘도 상전 같은 자식들 눈치 보랴, 나라님 같은 손자 녀석 챙기랴 애면글면 속이 타는 우리 동네 할매들을 기다린다. 그리고는 그 석탄 백탄 다 탄 끝에 고즈넉이 피워내는 넉넉한 웃음을 떠올려본다.

송광익(늘푸른소아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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