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종문의 펀펀야구] 류중일 '사표속죄' 속사정

야구경기는 수없이 많은 선택으로 점철되는 '멘탈 스포츠'다. 선택의 기로에서 고심 끝에 내려진 결정은 승부와 직결된다. 그렇다면 야구에서 감독과 수석코치 다음으로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은 어디일까? 3루 주루 코치 자리다.

우선 상황에 따라 감독의 지시를 선수에게 '블랙 시그널'로 전달해야 한다. 상대팀이 알아챌 수 없도록 어렵게 내기 위해 여러 위장된 제스처를 섞기 때문에 이를 '블랙 시그널'이라 한다. 보통 일년 동안 약 4가지 사인을 정하고 매 경기마다 하나를 골라 사용하는데 생각보다 사인 미스가 많이 나와 곤혹스런 순간이 종종 나온다.

경기에 앞서 미리 기억해둬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도 부담. 점수 차와 아웃 카운트, 주자 상황과 주자의 빠르기, 수비수의 송구능력은 기본이고 타구의 강도와 코스, 수비수의 위치, 바람의 세기와 방향, 구장의 크기와 그라운드 컨디션, 상대팀의 중계플레이 시스템 등도 감안해야한다. 이를 염두에 둔 채 많은 상황을 가정, 미리 머릿속에 밑그림을 그려둬야 실제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결정을 내리면서도 안전 운행을 할 수 있다.

더 힘든 것은 사람보다 공이 빠르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도 최종 판단은 최대한 늦게 해야 한다는 점. 3루 주루 코치가 얼마나 골치가 아플지 짐작이 간다.

물론 기본적인 룰은 있다. 무사에는 100% 안전한 상황에만 득점으로 연결시키고 1사에는 50% 정도의 성공 확률로 도전한다. 이 때는 송구가 정확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니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른다. 2사에는 무리하게 승부를 거는 경우가 많다. 포수가 공을 잡고 주자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되면 유능한 3루 주루 코치가 될 수 없다는 야구 격언도 이 때만큼은 논외다. 잘하면 본전이지만 못하면 역적으로 몰리는 처지니 괴로운 자리인 것이다.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 때는 경기 내내 비가 와 잠실야구장이 물이 찬 논바닥처럼 변했다. 현대에 3점을 뒤진 8회말 삼성의 공격. 무사1, 2루 상황에서 삼성은 1루 주자를 강명구로 교체했고 후속타자 조동찬이 우전안타를 쳤다. 땅이 질어 2루 주자 신동주가 빨리 뛰지 못하자 류중일 3루 주루 코치는 당시 현대 우익수였던 심정수의 어깨와 3점이란 점수 차를 감안, 주자를 안전하게 3루에 세웠다. 무사 만루를 만들어 대량득점을 노리는 전형적인 전법이었다.

한데 이 순간 경악할 만한 일이 발생했다. 홈 송구를 포기한 심정수가 2루로 천천히 송구하는 사이 2루를 돈 강명구가 3루로 향해 전력질주해버린 것이다. 류 코치는 하얗게 질려 버렸다. 반드시 앞 주자를 보아야 하는 주루의 기본법칙을 깜박한 대가로 결국 삼성은 8대7로 패배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에 류 코치는 사표를 준비했다. 주자의 잘못도 결국은 주루 코치의 책임이 절반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표는 지인의 한마디로 주머니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옷 벗고 나가면 도망가는 것이고 다음에 우승하면 그 빚을 갚는 것이다." 절치부심, 노력한 류 코치는 이듬해 우승으로 그 빚을 갚았다.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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