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자가 쓴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매

중학교 때 일이다. 늦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 가방을 던져두고 시장으로 갔다. 그 무렵 부모님은 시장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고 있었다. 아직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오는 주부들도 없던 시간, 한가한 시장 모퉁이 가게 한 켠에 앉아계시던 부모님. 묵묵히 반찬거리를 다듬고 계시던 그 모습을 보고 왜 울화가 치밀었는 지 알 수 없다. 큰 아들이 왔다며 반갑게 맞이하는 아버지에게 잔뜩 볼이 부어서 쏘아부쳤다.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이제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다만 가난한 것이 싫고, 이렇게 궁상떠는 모습도 싫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느닷없는 큰 아들의 악다구니에 아버지는 할 말을 잊은 듯 멍하니 계셨다. "아이, 짜증나!"를 외치고 돌아선 아들을 몇 번이나 불렀지만 느닷없는 분을 삭이지 못한 채 휑하니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늦은 저녁,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세운 뒤 종아리를 걷으라고 했다. "너 그렇게 가버리고 엄마가 많이 우셨다." 그 말 뿐이었다. 회초리를 맞는 동안 눈물을 흘렸고, 방에 돌아가서도 한참을 울먹이다 잠들었다. 이튿날 여느 때처럼 아버지는 새벽시장에 물건을 떼러 가셨다. 미숫가루 한 그릇으로 아침 허기를 달래고 그렇게 아버지는 새벽마다 시장을 다녀오셨다. "밤새 뒤척이시다가 새벽녘에 약 발라준다고 네 방에 들어가셨단다." 벌겋게 부은 종아리 위로 연고 자국이 남아있었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매를 맞았던 기억이다.

이제 아들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됐고, 아들의 아버지는 올해 칠순이 됐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셨다. 평생을 살아오며 거짓말 한 번 하지 못했던 분. 어쩌다 아들 손을 잡고 무단횡단이라도 할라치면 그게 겸연쩍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너는 이러면 안돼."라고 하시던 분.

아들을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시키겠다며 생업을 접고, 난생 처음 시장판 장사길에 뛰어든 분. 어려서 너무 철이 없었다고 쳐도, 궁상스럽던 부모님의 모습에 왠지 모를 화가 치밀었다고 쳐도, 사십대 후반에 벌써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아버지의 얼굴이 너무 애처로워 그랬다고 쳐도 아들은 아버지의 가슴에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어디 그 뿐이랴. 대학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면 호강시켜드리겠다던 약속은 벌써 십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약속으로만 남아있고, 가끔 아주 가끔 외식이라도 하자며 연락을 드리면 "왜 쓸데 없이 돈을 쓰느냐? 다음에 하자."는 꾸중아닌 꾸중을 핑계삼아 차일피일 미루던 게 몇 달인지 헤아릴 수도 없이 흘러버리고 말았다. 평생 늙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일 것 같던 아버지도 이젠 늙으셨다. 이제서야 그걸 깨달았다.

몇 해 전 술기운을 빌어 밤 늦게 찾아간 아들이, 사는 게 너무 힘들다며 호강 못시켜드려 죄송하다며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우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난생 처음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집안의 가장으로, 아내의 남편으로, 아이들의 아버지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지 그제서야 조금 깨닫게 된 아들에게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다독거릴 뿐이었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죄인일 수 밖에 없다. 사십년 가까이 아버지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오게 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들은 죄인이다. 늦은 밤,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아 아파트 뒷 베란다에 나가보면 바로 뒷동에 사시는 아버지의 집이 눈에 들어온다. 불 꺼진 창문을 바라보며 조용히 소리내어 "아버지!"라고 불러보곤 한다. 세상에 아버지만큼 힘에 겨운 이름이 또 있을까?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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