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 아버지

아버지의 꿈은 그리 크지 않다. 아무리 고된 하루를 보냈더라도 재잘재잘 하루 일과를 늘어놓는 자식들과, 쫑알쫑알 바가지를 긁어대지만 아이들에게만은 한없이 자상한 아내와 한 밥상에 둘러앉아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식사를 하는 것. 당신이 죽는날까지 가족들에게 이런 평범한 삶을 보장해 줄 수만 있다면 자신은 어떤 수고라도 감수할 사람들이 바로 이 땅의 아버지들이다.

하지만 요즘 이런 아버지의 꿈은 사실 그 어떤 것보다도 실현되기 어려운 '원대한 꿈'이 돼 버렸다. 아버지의 권위는 땅으로 추락해 더 이상 집 안에서 아버지가 설 자리는 없다.

△유령처럼 떠도는 아버지의 꿈

늘 산처럼 높아보이고 단단해만 보였던 아버지의 모습. 이들이라고 왜 가정과 아이들에게서 해방돼 자신의 꿈을 찾아 훨훨 날고 싶은 욕망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아버지들의 삶은 치열한 전쟁이다. 한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지금껏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내릴 것 같은 위기감에 쫓기며 하루하루를 살아왔기에 잠시의 '한눈'도 보통의 아버지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유순하 작가가 쓴 '멍에'라는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생애 내내 간절히 소망해 온 것은 도망이었다. 모든 의무, 모든 관계로부터 완벽하게 도망치고 싶었다. … 살을 태우고야 말 듯한 불볕을 무릅쓰고 온종일 개펄을 헤매고도 게도, 구럭도 다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줄기차게 허탕만 치며 아무래도 헛살았다 싶은 자괴감. 그 잡답 속에서 오싹 고독감이 느껴졌다."

이래저래 지쳐가지만 아무도 아버지의 팍팍한 삶을 이해해주지 않는다. '어버이날'이 돌아오면 선물 하나 내밀며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가끔 축져진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아파하지만 그렇다고 따스한 손을 내밀어 주지는 않는다. 지금이라도 정말 가정적이고 자상한 아버지로 변신해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지만 지금껏 살아온 삶의 형태를 벗어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전통적 가정에서 성장해 가부장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있지만 자식들에게 이런 사고방식을 강요할 당위성조차 잃어버린 '낀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점점 침묵속으로 잠겨들어 외톨이가 될 뿐이다. "도대체 내가 뭘 그리 잘못했길래."라고 수없이 되뇌봐도 그 답을 찾을 수 가 없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점점 말을 잃어간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들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 신해철이 쓴 '아버지와 나'라는 노래에 등장하는 가사다.

△자상하고 헌신적인 '슈퍼대디'를 원하는가

미디어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의 모습도 시대의 변화와 함께 많이 바뀌었다. 1990년대 초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 그는 권위주의적이고 엄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미움과 함께 사랑도 많이 받았다. 드라마의 묘미는 단연 대발이 아버지 이순재의 변화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평생을 잡혀 살기만 했던 아내(김혜자 역)의 반란이 시작됐고, 점차 변해가는 대발이 아버지를 지켜보는 것이 시청자들의 쏠쏠한 재미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드라마 속에서 '정형화된' 아버지상을 찾아보긴 어려워졌다. 일단 아버지 역의 비중이 상당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굳세어라 금순아'에도, '내 이름은 김삼순'에도, '달자의 봄'에도 아버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존재하더라도 그 비중이 미미하거나 뒤틀려진 모습으로 반영되는 사례도 상당수다. '착한여자 나쁜여자'에서 아버지는 자식조차 팽개친 패 바람피는 인물로,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정준하는 직업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채 나이 마흔을 넘어서도 아버지에게 하이킥을 당하는 무능력하고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그려질 뿐이다.

그래도 최근 드라마 중 KBS의 '하늘만큼 땅만큼'은 달라신 세대, 새롭고 다양한 아버지의 모습을 모색하고 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지수 아버지 윤재두(정동환 역), 무영이 아버지 김태식(정한용 역), 지수 아버지 석종훈(홍요섭 역)은 한없이 자상하지만 든든한 산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제각각 그려내고 있다. 아들의 이혼 소식에 함께 눈물 흘려주고 양자를 입양하기도 하는 무영이네, 딸의 이성문제에 함께 고민하고 아파해주는 지수네, 재혼을 통해 이뤄진 가정이지만 딸들을 위해 마음바쳐 헌신하는 은주네 아버지는 우리 사회가 지금 바라고 있는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아닐까?

■아버지 대중문화판을 휩쓸다

올 봄 영화판은 '아버지'들로 북적인다. 기껏해야 조연, 그것도 아예 한동안은 스크린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아버지들이 갑작스럽게 주연배우로 등극했다. '날아라 허동구', '아들', '눈부신날에', '우아한세계' 등 아버지가 모티브가 되거나 주인공인 영화는 줄잡아 10여편. 이렇게 아버지 영화가 봇물을 이루게 된 것은 이미 예견됐던 일이었다. '말아톤'을 시작으로 '해바라기', '허브' 등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모정을 부각시키는 영화가 줄줄이 이어지자 그 다음은 아버지 차례라는 말이 영화판에서는 공공연하게 떠돌았다는 것. 게다가 영화계가 침체기로 접어들자 적은 비용으로 많은 관객을 모을 수 있는 감성형 가족영화 제작이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요즘 스크린을 메운 아버지는 더 이상 예전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모습이거나 무기력하고 소외당하는 아버지가 아니다. 모성애 영화처럼 절대선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소심하거나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는 인간적인 존재로 그려질 뿐이다.

학교 가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IQ 60인 아들 동구를 졸업시키기 위한 아버지의 노력을 그린 '날아라 허동구', 15년 만에 아들과 상봉하는 무기수의 하루를 그린 '아들', 어머니의 제사를 위해 3년 만에 모인 아버지와 자식들의 상봉기를 보여주는 '이대근, 이댁은' 등 망가지고 부서진 모습이지만 결국에는 가정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고 적극적인 역할을 모색하는 아버지들로 그려진다.

대중문화판에서도 아버지의 등장이 늘어나고 있다. 상반기 연극계 최대 이슈로 떠오른 연극 '경숙이, 경숙이아버지'는 매회 만원사례를 기록하는 것도 모자라 연장공연까지 돌입할 정도였다. 또 가수 SG워너비는 신곡 '아버지 구두'를 발표해 눈길을 모았다. 이 외에도 현대건설은 힐스테이트 광고 시리즈 2탄으로 '아빠의 가치'시리즈 제작에 들어갔으며, 출판계 역시 '아빠의 습관혁명', '아버지의 가계부' 등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대중문화에서의 아버지의 귀환과 함께 우리 삶 속에서도 아버지가 돌아올 수 있을까?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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