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칼의 노래

▲ 조향래(문화부장)
▲ 조향래(문화부장)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를 가만히 읊조려보면 '칼의 노래'가 들려온다.

작가 김훈이 장편소설로 그린 '칼의 노래',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탤런트 김명민의 중후한 연기로 부활한 '칼의 노래'. 우리가 이 '칼의 노래'에 각별히 주목한 것은 무엇보다도 충무공 이순신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점일 것이다.

'칼의 노래'는 '임진왜란'이라는 대전란의 와중에서 전투를 전후한 비장한 심경과 혈육의 죽음에 대한 아픔, 여인과의 정분 그리고 권력의 폭력성과 무상함을 그려내면서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와 내면세계를 새롭게 조명했다.

'칼의 노래'는 그래서 참혹한 전쟁에 사무친 칼의 고뇌와 무장의 피울음인 것이다. 군사정부 시절 지극히 영웅화된 '성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삶의 애환과 시대에 대한 번민 그리고 죽음에 대한 사유 등을 실존적으로 그리고 있어 더 가슴에 와닿았을 것이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는 측면에서 어떤 논자들은 이순신에 대해 이런 극적인 표현까지 내놓는다. "사회적으로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한 인물이 스스로를 다스리고 노력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다가 뜻하지 않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영웅적인 자취를 남기게 되었다."라고….

사실 이순신은 애초에 영웅적인 행동을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다. 평범한 관료로서 처세에 무관심하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을 뿐이다. 비록 학문을 했으나 당시의 주류인 문관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평생 武(무)를 업으로 삼아온 전형적인 무장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학문하는 선비의 풍모를 갖춘 무장이었다. 충무공 이순신의 영웅적 행적 밑바탕에는 조선 성리학이 다듬어 놓은 선비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무관이었지만 문관인 서애 류성룡과 知己(지기)였던 것도 그렇다.

이순신이 이처럼 선비정신으로 무장된 장수였다면, 남명 조식은 칼을 찬 유학자였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士禍(사화)로 얼룩진 위기와 혼돈의 시대를 사상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한국정신사의 거목 남명에게는 어쩌면 협객의 이미지까지 서려 있다.

'離宮抽太白 霜拍廣寒流 斗牛恢恢地 神游刃不游'(불 속에서 하얀 칼 뽑으니, 서릿발 같은 빛 달까지 흐른다, 북두 견우성 떠있는 넓디넓은 하늘에, 정신은 놀아도 칼날은 놀지 않는다.)

남명이 장원 급제한 제자 조원의 칼자루(劒柄)에 써 준 이 오언절구 또한 '칼의 노래'에 다름 아니다. 훈구, 척신이 우글거리는 궁궐(廣寒)의 달빛을 가르는 서릿발 칼날의 달인. 그가 바로 유학자 남명이다.

이순신과 남명의 '칼의 노래'는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임진왜란의 현장에서 만난다. 조선의 바다를 왜적으로부터 지켜내던 이순신이 죽음의 위기에 몰렸을 때, 그를 구원한 인물이 바로 남명의 제자인 정탁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남명의 '칼의 노래'는 곽재우, 정인홍, 김면, 조종도 등 문하의 의병장으로 이어져 구국충정의 칼날로 다시 섰다. 그런데 이순신과 조식의 칼날은 항상 스스로를 향해 있기도 했다. 자신을 다스리는 삼엄한 敬(경)의 경지.

그것은 실천철학과 마음의 철학을 함께 지녔던 조선 유학의 힘이기도 했다. 작가 김훈이 소설 '칼의 노래'에 부제로 단 '충무공-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란 대목도 참된 武道(무도)와 올곧은 선비정신을 함께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충무공은 무장이면서 문인의 정신을 갖춘 인물이었고, 남명은 문인이면서 무인의 기백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칼의 노래'는 결국 淸高(청고)한 선비의 기상과 剛毅(강의)한 무인의 정신을 대변하는 노래인 것이다.

415년 전 壬辰年(임진년)의 5월처럼 절박하지는 않더라도, 나라와 겨레의 운명은 여전히 기로에 놓였는데, 어떻게 이 땅에는 '칼의 노래'를 부를 위인도 '칼의 노래'를 애써 들으려는 사람도 없는가.

조향래(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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