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기다리던 책이 도착했다. 책 '담장 허무는 엄마들'(봄날 펴냄·blog.naver.com/damjangmom)은 2005년 8월부터 매월 넷째 주 오후 3시에서 한 시간 동안 성서공동체 FM(89.1Mhz)을 통해 방송되는 프로그램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는 장애아동을 키우는 엄마들의 방송으로, 책에는 1년6개월간 방송된 사연과 편지, 육아일기 등이 고스란이 담겨 있다. 중증 장애아를 키우면서 오랫동안 엄마들의 가슴 속에서 곰삭은 말들이어서일까. 나지막한 목소리지만 심금을 울린다.
이 책은 형진이나 진호처럼 비장애인도 부러워할 만한 장애인의 성공기가 아니다. 자식보다 하루 더 사는 게 소원인 엄마들이 자식을 세상에 내려놓기 위해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를 날것으로 들려준다.
중증장애아를 온몸으로 껴안으며 세상을 헤쳐온 사연을 읽다보니 엄마들이 궁금했다. 힘들지만 아이들과 함께 웃으면서 투쟁해온 투사, 여자임을 잊고 엄마로서 살기에도 벅찬 여성, 작은 어깨에 여러 가지 이름을 안고 살아야 하는 그들. 그래도 '다음 세상에도 나는 너의 엄마'라고 말하는 큰 사랑을 안은 엄마들을 만나봤다.
# 엄마로 산다는 것
장애아동을 가진 엄마에겐, 엄마로서의 삶이 전부다. 24시간, 오직 장애 아이를 위해 대기조가 돼야 한다.
건이 엄마 최순옥(46) 씨는 하루 종일 학교를 지키고 있다. 근력이 저하된 건이가 불편해할 때마다 달려가 자세를 고쳐줘야 하기 때문이다. 건이는 진행성근이양증을 앓고 있다.
건이의 나이 지금 16세. "병원에서 스무 살까지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아이가 우리를 떠날 날짜를 대충 안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에요. 다른 엄마보다 4, 5배 더 잘해주고 하루하루 즐겁게 해주려고요." 최 씨의 눈가엔 눈물이 맺힌다.
어릴 때 눈도 안 마주칠 정도로 자폐증세가 있던 건이였지만, 최 씨의 끝없는 노력으로 이제 자폐증세는 거의 사라졌다. 이처럼 엄마는 아이에게 제일 엄한 선생님도 돼야 한다. 24시간, 그것도 수십 년간 아이와 밀착해 있다 보면 엄마와 아이의 삶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나리 엄마 전정순(48) 씨는 나리를 서울 소재 대학으로 보내면서 반년 동안 많이 아팠다. "내가 아이 속에 들어가 나리의 삶을 살고 있었던 거예요. 한동안 정말 많이 울었어요." 밥조차 혼자 먹지 못하는 나리지만 당당하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 엄마를 닮았다. "가슴으로 나리를 끌어안고 밖으로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운 것밖에 없는데, 어느 날 보니 나리가 나를 닮아 있네요."
# 여자로 산다는 것
세 쌍둥이 엄마 전득숙(43) 씨는 10년 넘도록 주말부부로 살아왔다. 남편은 진주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자신은 친정이 있는 대구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아들 세 쌍둥이 중 둘째 현준이가 지체장애를 갖고 있기에 주변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 한때 남편과 서로 불안해 했지만 방송을 하고 책이 나오면서 이젠 더 이상 아니다. 남편은 요즘 그녀에게 운동도 하고 영양제도 먹으라고 말한다.
'당신은 현준이보다 하루 더 살아야 한다고 했지? 나는 당신보다 하루 더 살아서 네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해줄게. 고생 많이 했으니까, 가는 길 만이라도 지켜주고 싶어.' 씩씩하던 전 씨도 인터뷰 도중 눈물을 쏟고 만다.
이들은 '장애 아동의 엄마'에서 '나'를 찾아나가는 방법을 방송 '담장 허무는 엄마들'에서 찾았다. 한 달에 한 번 힘겨운 외출을 하는 이들은 방송 대본을 쓰고 음악을 고르고 사연을 읽으며 점차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아이와 함께 하는 길이기에 더욱 힘이 난다고.
방송을 하고 방송CD를 이리저리 배포하자 숨어있던 장애아를 둔 엄마들이 하나 둘씩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안으로만 삭여왔던 사연을 공개했고 함께 아파하며 함께 웃었다. 아직은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기 꺼리는 엄마들이 더 많지만, '담장 엄마들'은 상처를 밖으로 끄집어내고 승화시켜야 사회가 바뀐다고 믿는다.
책 '담장 허무는 엄마들'이 장애아동들을 키우는 이야기지만 어둡지만 않은 이유는 그들의 일상에 웃음이 있고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방송을 한 후 빛과 소금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도 큰 수확이다. "온 마음을 다해서 손잡아 주는 사람들이 많아요. 전체 2%밖엔 안 될지라도 우리가 앉아만 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소금 같은 사람들이죠."
# 투사로 산다는 것
엄마의 가장 큰 적은 뜻밖에도 아빠다. 장애를 가진 자식을 온전히 인정하는 아빠는 10~20%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자식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니 어깨가 늘 처져 있다. 하지만 방송을 시작한 후 아빠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양금자(47) 씨가 책 판매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가던 날, 광수에게서 비누냄새가 솔솔 났단다. 아빠가 하루종일 광수 식사는 물론 목욕까지 시켜준 것. "집 안에서 가장 먼저 담장이 무너졌어요. 그동안 모든 것이 제 몫이었지, 아빠는 못한다고 했거든요." 양 씨는 마냥 힘이 난다.
세상을 위한 싸움도 이들의 몫이다. 민지 엄마 박예준(50)씨 역시 부드럽지만 당당한 투사가 됐다. "복합 장애를 가진 우리 아이가 못하니까 엄마가 대신 민지의 권리를 대변해 주는 거예요." 분만 당시 병원의 의료사고로 심각한 장애를 얻게 된 민지는 엄마에겐 사랑스러운 딸일 뿐. 엄마는 이 딸을 위해 온몸으로 싸운다. 장애아동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삭발투쟁까지 마다않는 그녀들은, 바로 아름다운 투사였다.
앞으로 싸워야 할 것은 많다. 중증 장애아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갈 곳이 없다는 것은 엄마들의 가장 큰 숙제다. 장애아 학교에서 장애 정도를 고려한 개별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자폐아동이면 마라톤이나 수영을 시키면 되지'라는, 장애를 획일적으로 생각하는 시선도 문제다.
'내 아이가 하필'이라고 생각하는 장애아 엄마들을 위해 전정순 씨가 조언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존재 이유가 있어요. 나리 하나가 학교를 바꿔냈고, 우리 나리의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감동하고 행복해하거든요. 우리 아이가 세상에 손 내밀고 그 손을 잡아주면서 세상이 밝아지는 것, 그것이 나리가 세상에 보내진 이유가 아닐까요. 세상의 빛나는 한 조각으로 말이죠."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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