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술 강요 문화

서먹하고 어색한 사이라도 밥을 같이 먹거나 목욕을 함께 하면 빨리 친해진다. 술도 그러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술만큼 빠르게 거리를 좁혀주는 것도 드물 것이다. 중요한 비즈니스, 사교모임 등 각종 만남에서 술은 약방의 감초처럼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해낸다.

그런데 술이란 것은 적정선을 지킬 때는 뛰어난 효력을 발휘하지만 지나치면 毒(독)으로 돌변한다. 우리네 飮酒(음주)문화는 외국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허용적이고 관대하다. 기분이 상큼해진 수준에서 그야말로 쿨(cool)하게 끝나는 경우는 드물다. 2차, 3차에 폭탄주 돌리기, '흑기사'(대신 술 마셔주는 사람) 등장까지 곤드레 만드레 되도록 이어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음주로 인한 온갖 실수나 잘못도 대부분 너그럽게 용서받는다. "술 한잔 걸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백지로 돌려지기 일쑤다. 술자리 일을 지적하면 "저 밴댕이 소갈딱지"라며 되레 손가락질당하기 십상이다.

이런 음주문화에서 결국 언젠가 터질 일이 터졌다. 법원이 회식자리에서 부하직원들에게 술 마시기를 강권한 직장 상사에게 '인격권과 행복권 침해'를 이유로 3천만 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인사권을 가진 부장은 '목 걱정'으로 꼬박꼬박 전원 참석하는 부하직원들에게 새벽까지 계속 술 마시기를 강요했다. 위가 아파서 못 마시겠다는 신참 여직원에게는 안 마시면 남자직원과 키스를 시키겠다는 둥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여직원은 술 때문에 건강을 해쳤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지게 되면서 사표를 던졌다.

酒黨(주당)이라면 지난해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 1천330명을 대상으로 한 '회식자리 꼴불견 유형'조사 결과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겠다. 성별'연령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남성들은 회식자리 꼴불견 1순위로'酒邪(주사)가 심한 사람'(36.8%)을 꼽았고, 그 다음으로'술을 계속 강요하는 사람'(26.8%), '술값 계산할 때 사라지는 사람'(18.2%)을 꼽았다. 반면 여성들은 압도적으로'술을 계속 강요하는 사람'(40.7%)을 가장 기피한다고 답했다.

적당한 술 권하기는 인정과 미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불건전한 음주행태는 '불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이번 법원 판결의 메시지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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