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말과 글이 흐르는 풍경)너흰 다 모른다

역마살이 끼어 바람처럼 밖으로 떠돌던 외할아버지를 기다리며, 평생을 시장바닥에서 채소를 팔아 어머니와 울산 이모와 뉴욕의 외삼촌을 혼자서 키우셨다는 우리 외할머니. 자식들 공부시켜 짝지어 떠나보낸 후 채소가게도 걷어치우고 그림자처럼 혼자 외롭게 지내던 외할머니는 재작년엔가, 외할아버지가 털 빠진 장닭의 몰골로 돌아오신 후로 다시 채소 팔던 시절의 목소리를 되찾았습니다.

일년 삼백 육십오일, 눈뜨고부터 잠들 때까지 외할머니는 요즘 외할아버지를 달달 볶아대는 재미로 사시는 것 같습니다. 외할아버지의 모든 행동이 외할머니의 잔소리 감입니다. "텔레비전 소리는 왜 그렇게 크게 하느냐, 젖은 수건을 왜 소파에 걸쳐 두느냐, 국물을 흘리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없느냐, 왜 벗은 양말을 짝짝이 팽개쳐 두느냐…"는 둥. 어쩌다 외할아버지가 대꾸라도 하시면, 외할머니는 또 얼씨구나 잘 걸려들었다는 듯이 지난 시절 이야기를 보따리 채로 풀어놓습니다. '어린 새끼들과 마누라 팽개치고 당신 혼자 조선 천지를 구름처럼 떠돌 때 나는 새벽같이 시장 바닥을 헤매며…'로 시작하여 호미로 감자 알 하나하나 캐내듯이, 지난 세월 속에 묻힌 외롭고, 서럽고, 억울했던 발자국을 다 밝혀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태세로 몰아세우십니다. 이쯤 되면 외할아버지는, 이제 늙어 짖지도 못하고 밥만 축내는 누렁이처럼 꼬리를 내리고 부처님처럼 지그시 눈을 감고 앉아 묵묵부답이십니다.

지난 주말, 외갓집에 갔을 때도 온 식구가 빙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또 외할머니의 잔소리가 어김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쩝쩝하는 소리 내지 않고 밥을 자실 수는 없어요, 자기 입만 입인 줄 아나, 고기 반찬은 애들 좀 먹게 놔 둬요…" 할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고개를 숙이고 어른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외할아버지가 버럭 화를 내시면서 숟가락을 던지고 일어나셨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가 벌떡 일어서서, "아버지는 엄마한테 화낼 자격조차 없어요! 엄마가 고생하며 우리 키울 때 아버지는 어디서 뭐 했어요?" 하며 따지듯이 대들자, 외할아버지는 한참 동안 어머니를 바라보시더니 그냥 현관문을 꽝 닫고 집을 나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밤이 깊도록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려는데 거실 쪽에서 외할머니의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도 에미야, 너는 네 아버지를 마구 대하면 안 된다. 어쨌든 네 아버지 아니시냐? 생각하면 네 아버지도 참 불쌍한 사람이다. 여섯 살부터 계모 밑에서 온갖 설움 받고 자라서…오갈 데 없는 양반이 또 어디를 헤매느라 아직 안 돌아오시지. 내 가슴속 까만 속내를 너흰 다 모른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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