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7시쯤 대구예술영재교육원 합주실. 40여 명의 학생들이 새로 받은 악보를 펴고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갑자기 지휘를 맡고 있는 이재준 음악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 학생이 고장난 악기를 고쳐오지 않은 것. 이 감독은 악기 튜닝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런 준비 상태로 무슨 합주를 하겠나. 뭐하는 거냐."고 계속 다그쳤다. 마치 성인 오케스트라를 대하듯 엄격했다. 지휘봉을 땅땅 두드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연방 야단을 쳤다. 이윽고 합주를 끝낸 이 감독이 "프로가 돼야 할 학생들이기 때문에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한 영재원 강사가 "감독님만 불만이 있지 여기 있는 모두가 학생들의 수준에 만족하고 있다."고 받아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전국 최초의 교육청 예술영재원
승용차를 타고 국우터널을 빠져나와 대구 북구 국우동 방면으로 향하자 비닐하우스와 밭이 넓게 펼쳐진 칠곡3지구 외곽이 눈에 들어온다. 새로 지은 아파트와 오래된 농촌 가옥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이곳이 대구예술영재교육원의 보금자리. 다시 좁은 시골길을 따라 들어간 곳에는 나지막한 2층짜리 학교가 다정하게 손님을 반기고 있다. 폐교(옛 도남초교)를 새단장한 건물이다.
"그동안 예술분야 영재 교육은 개인 능력에만 맡겨져왔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음악가, 화가의 꿈을 키우는 학생들을 공교육에서 맡아 키워보자는 취지로 영재원이 탄생한 겁니다." 신병주 영재원 교사의 말이다.
대구예술영재교육원은 현재 전국에서 유일하게 교육청이 직접 운영하는 예술분야 영재교육 시설이다. 시·도 단위로 수학, 과학 영재를 육성하는 곳은 많지만 예술 영재들을 키우는 곳은 대구가 처음이다. 대구예술영재교육원은 건물 보수 등 몇 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2005년 10월 개원했다.
음악 분야에서는 피아노, 현악, 관악, 성악, 국악 등 개인실기반 20명과 합주반('유스오케스트라') 70명, 합창반 60명의 정원을 두고 있다. 매주 수요일과 금·토요일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영재원 셔틀버스로 이동해서 음악이론이나 합주 수업을 한다. 단일 학교로는 경북예고 학생들이 가장 많지만, 일반계 고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있다. 미술반(30명)도 운영하고 있다.
올해로 2년차를 맞았지만 영재답게 벌써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달 전국 초·중·고교생 음악콩쿠르와 각종 미술대회에서 이곳 학생들이 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유스오케스트라 경우 내년 2월쯤에는 스페인, 후년에는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연주를 초청받을 정도로 국외에서까지 명성을 얻고 있다. 이재준 음악감독은 "현재 대구예술영재교육원은 문화관광부에서 벤치마킹을 요청해 올 정도로 성공적으로 정착된 사례"라고 평가했다.
▶예술 영재의 산실
대구예술영재교육원이 이처럼 짧은 기간에 큰 성과를 낸 것은 엄격한 선발과정과 유능한 강사들의 높은 수업 수준 덕분이다.
20명의 개인실기반 학생들은 매년 선발시험 때 신규 지원자들과 함께 시험을 치른다. 실력으로 말할 뿐 재학생이라고 유리한 점은 없다. 시험에 떨어지면 영재원을 나가야 한다. 올해 고교생 2명을 탈락시키고 들어온 신입생은 초등학생들이었다. 1차 전공실기, 2차 청음·초견·음악창의성 테스트·면접 순으로 치러지는 개인실기반 시험은 대학 입시 못지 않게 난이도가 높다는 것. 합주반 경우 정원이 70명이지만 현재 인원은 48명이다. 정원이 남아도 실력이 부족하면 뽑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수한 강사진도 대구예술영재교육원의 강점. 계명대, 대구가톨릭대, 경북대, 충남대, 대구시립교향악단 등의 교수 17명과 프로 연주자들이 교육을 맡고 있다. 특히 음악레슨의 꽃이라 불리는 '마스터 클래스' 경우 지난해 김남윤(바이올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블라디미르 샤킨(피아노)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 등 대가들이 공개 레슨을 했다. 올해도 한국예술종합학교, 비엔나국립음대, 바이마르 국립음대 교수 등이 마스터 클래스 스케줄을 잡았다.
이런 높은 수준의 강의는 학생들의 기량을 키워줄 뿐 아니라 자부심도 높여주고 있다. 김수지(경북예고 2년·플루트) 양은 "청음(곡을 듣고 악보로 받아 적는 수업)이나 시창(처음 본 악보를 연주하는 것) 등이 큰 도움이 됐고, 또래 학생들과의 합주도 좋은 경험이 되고 있다."며 "같은 학교 친구들이 많이 부러워한다."고 만족해했다. 박양지(경일여고 1년·플루트) 양도 "일반계고에서 전공 준비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곳에서 좋은 교수님들과 인간관계를 쌓으며 합주를 할 수 있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예린(동원중 3년·클라리넷) 양은 "합주를 해보면 이곳 학생들이 정말 뛰어나다는 것을 느낀다. 여기서 실력을 키워 꼭 뛰어난 연주자가 되겠다."고 꿈을 내비쳤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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