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느낌(sense of apology)이 든다." 지난주 미 의회 지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아베 일본총리가 '위안부 문제'를 두고 했다는 말이다. 1984년 히로히토 일왕이 과거사를 반성한다며 말했다는 '痛惜(통석)의 念(염)'과 같은 맥락이다. 좋게 봐주면 '외교적 수사'고 실제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아베 총리의 이 발언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러자 아베 총리는 부시 미국 대통령 앞에서 "인간으로서 총리로서 마음으로부터 동정하고 있으며 죄송스러운 마음"이라고 한 발짝 물러났다.
아니 사과를 하려면 당사국인 우리나라나 아시아 국가, 그 피해 할머니들에게 할 일이지 미국 대통령에게 머리를 조아릴 일이 아니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를 무시하는 일본의 이중적 태도는 스스로 나라의 품격을 낮출 뿐이다. 사람에게만 품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라도 품격이 있다. 사람들은 조금 잘산다고, 힘이 세다고 으스대는 졸부나 덩치를 존경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러려니 무시하고 손가락질할 뿐이다. 한마디로 어른대접을 하지 않는다.
나라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2006년 GDP는 4조 4천636억 달러다. 13조 2천620억 달러의 미국에 이어 부동의 세계 2위 경제대국이다. 그런데도 국제사회는 일본을 지도국가(leading country)로 잘 대접하지 않는다. 왜일까? 답은 간단하다. 지도국가로서의 도덕적·도의적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가 엿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도량과 포용하는 소양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의 일본사람들을 그 선대들이 저지른 악행과 緣坐(연좌)시킬 의도는 추호도 없다. 문제는 오늘날 일본과 일본인들의 평균적 생각이다. 지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어떤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는가이다. 왜냐하면 한·중·일 동북아 3국은 미우나 고우나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는데 어깨동무를 하고 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중·일 동북아 3국이 티격태격하게 되면 모두에게 손해이기 때문이다.
어제 없는 오늘이 없고, 오늘 없이 내일은 없는 법이다. 옛날에 싸웠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피해자는 '죽다 살아났다'고 아우성치는데, 정작 가해자가 '별거 아니었잖아'라고 한다면 이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진정 내일을 함께 열어 갈 수가 없게 된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한 이후 15년 동안 중국인들에게 한없는 고통을 주었다. 또 우리민족에게 국모가 시해됐던 을미사변과 을사늑약 그리고 35년 일제강점은 두말할 것 없는 악몽이었다.
왜 일본은 아직도 옹졸한 우물 속에 갇혀 있을까? 일본은 미국이라는 든든한 후원자, 시쳇말로 '백'을 믿고 오만함과 우월감에 젖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말 당시 세계 패권국가인 영국과 미국의 후원으로 중국을 격파하고, 러시아를 깨부수고 드디어는 한반도를 병탄했던 그들이다. 20C 말 동서냉전이 서방세계의 일방적인 승리로 귀결되면서 슈퍼파워 미국은 세계전략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대서양지역에서는 영국을, 태평양지역에서는 일본을 제1의 동맹국으로 하여 새로운 '패권구도'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일본이 우쭐할 만도 하기는 하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특정 1개국이 장기적·일방적으로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것은 세계의 조화로운 발전과 인류의 共同善(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바람직하지 않다. 장차 세계의 권력구도는 보다 더 다원화되어야 한다. 즉 미국이 한 축이 되고, EU(유럽연합)가 다른 한 축이 되며, 한반도·일본·중국의 동북아 3국이 함께 한 축이 되어 아시아적 이익과 가치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지정학적· 문화적·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3국의 과제이기도 하다.
지금 일본은 일시 우쭐한 마음으로 미국의 以夷制夷(이이제이), 일본을 부추겨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남진정책이 한창이던 때 중국의 외교관 黃遵憲(황준헌)은 조선책략을 통해 동북아 3국이 취해야 할 전략을 얘기했다. 즉 조선의 입장에서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속하고, (멀리 떨어진) 미국과는 (느슨하게) 연대하라(親中國·結日本·聯美國)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을 등지고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보다 장기적·거시적 관점에서 동북아 3국 간에 연대를 형성하려는 일본의 진지한 노력이 더욱 긴요한 때다.
박철언 (사)대구경북발전포럼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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