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 잡는 게 매'라는 옛 말이 있다. 매가 아무리 멋있고 용감해도 꿩을 잡지 못하면 쓸모가 없다는 뜻. 여기에다 '질병'과 '의사'를 대입시키면 '병을 고치는 게 의사'라는 말이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호락호락한 것만은 아니다.
외과 수련의 시절 소도시의 병원에 파견근무를 할 때의 일이다.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가 진찰을 받으러 오셨기에 "어디가 불편하세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대답은 않고 나를 물끄러미 한참 쳐다보시다가 한마디 하셨다. "맞-춰-봐!"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예? 어디가 불편하시다고요?" 할머니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왜 말해? 의사가 알아내야지!" 그제야 가까스로 상황파악이 된 나는 웃으며 간청을 했다. "아이구, 제가 어디 점쟁인가요? 조금만 가르쳐 주세요…." 할머니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결국 가르쳐 주셨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머리가죽에는 고춧가루를 뿌린 것 같아."
어찌어찌해서 진료는 무사히 마치고 할머니는 가셨다. 생각해보니 우습기도 해서 같이 있던 간호사에게 들으라는 듯 혼잣말로 "환자가 이야기를 안 해 주면 의사가 알 수가 있나…."라고 했다가 이내 말문을 닫아버렸다. (말 못하는 동물과 표현력이 부족한 아이를 진료하는) 수의사와 소아과 의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뒤 더 어렵고 황당한 일을 여러 차례 겪게 됐다. 환자들이 다른 병원에서의 검사 결과나 소견을 일부러 감추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인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의사의 입장에서는 여간 당혹스런 것이 아니다. 여러 검사를 통해 어렵사리 진단을 내리고, 하마터면 놓칠 수 있던 것도 찾아내 환자가 놀랄까봐 조심스레 결과를 이야기하면 환자는 슬쩍 보호자를 뒤돌아보며 내게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지난번 병원의 의사 말이 맞는가 보네?"
전문의 자격을 얻은 뒤 전방 사단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초급장교 한 명이 진료실에 들어섰다. 자꾸 주위의 의무병을 의식한 듯 힐끔거리며 말을 하지 않아서 의무병들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고 했다. 의무병들이 나가자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제 친구 대신에 왔는데…."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예, 그러면 친구 대신에 이야기해 보세요." 그러자 도저히 본인이 아니고선 알 수가 없을 것 같은 친구의 증상들을 이야기했다. "물론 친구가 직접 와서 소변 검사를 해 봐야 가장 확실하겠지만 거의 임균성 요도염인 것 같습니다. 성병의 일종인데 속칭 임질이라고도 하지요." 초조한 표정으로 초급장교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약을 친구 대신 타 갔으면 하는데요…." 내가 대답했다. "먹는 약보다는 주사약으로 특효약이 있으니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요?" 초급장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친구가 직접 올 형편이 도저히 안 돼서…." 그쯤에서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주사를 대신 맞고 갈 수도 있는데…." 그랬더니 그 초급장교는 안색이 밝아지며 "아! 그래도 되겠습니까?"라며 친구 대신 주사를 맞고 연방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정호영(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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