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검사의 눈, 변호사의 가슴

그날따라 사내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전날 밤 늦게까지 여자와 촛불을 켜놓고 와인을 마시면서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앞으로는 마냥 즐겁고 행복하게만 살자고 굳게 다짐을 했던 터였다. 그리고 그날은 설을 맞아 고향에 있는 노부모와 전처 소생의 어린 삼남매에게 새며느리, 새엄마를 인사시키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3년 전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다가 싱거운 친구의 즉석 미팅 제의로 처음 만난 이혼녀지만, 자그마한 몸매와는 달리 경상도 여자 특유의 화끈하고 야무진 성격이 느슨하고 맘씨 좋은 충청도 사내에겐 더 없이 어울리는 짝이었다.

사내는 아직 잠에서 덜 깬 여자의 코를 살짝 비틀어주고는 휘파람을 불어가며 샤워를 했다. 욕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따뜻하다. 그렇게 기분좋은 설연휴 첫날 아침에 비극은 그만 작은 사진 한 장에서 비롯됐다.

사내가 면도를 한 후 로션이 다 떨어져 여자의 것을 좀 얻어 쓰려고 화장대 서랍을 열었는데, 그 안에 있던 수첩 사이에서 사진 한 장이 삐죽이 나와 있다. 사내를 만나기 전 여자가 잠시 교제했다는 박 사장과 설악산에서 찍은 사진이다.

현기증이 난다. "서영 씨, 우리 이런 거 모두 다 정리하기로 했잖아!" 사내의 고함소리에 발딱 일어난 여자가 "뭘 그까짓 것 가지고 그래?"라며 홱 토라져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그릇 덜거덕거리는 소리만 요란하다. 사내의 볼멘소리가 이어지고, 궁지에 몰린 여자의 입에서 결국 "헤어지자."는 막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성을 잃은 사내가 여자의 뺨을 한 대 때리자, 여자는 더 독기를 뿜고 달려들었다. 결국 발악하는 여자를 제압하기 위해 사내가 온몸으로 여자의 얼굴과 가슴을 짓눌렀다. 그리고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차' 정신을 차려보니 여자가 조용하다. 깜짝 놀란 사내가 여자의 목뒤를 받쳐 드니 목과 팔이 축 늘어진다. 큰일났다. 와락 울음이 터진다. 여자의 이름을 불러보고 몸을 흔들어보고 가슴 마사지와 인공호흡을 해봐도 아무 반응이 없다.

농사일에 찌든 노부모님 얼굴이, 노부모에게 맡겨놓은 삼남매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 기막힌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삼일 밤낮을 여자의 주검 옆에 쪼그려 앉아 있던 사내는 결국 자기 손으로 여자를 묻어 주기로 했다. 예쁜 속옷을 꺼내 갈아입히고 평소 아끼던 검은색 이태리제 양장을 입힌 뒤 늘 덮던 분홍색 얇은 이불로 여자를 감싸 묶었다.

지난 연말 함께 찾았던 거제도 해금강이 보이는 산언덕으로, 가끔씩 가서 회를 먹던 포항 월포리 바닷가로 갔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차를 돌려 고향마을이 바라다보이는 청원군 은적산 기슭으로 갔다. 그렇게 여자를 묻고 돌아온 날 밤 여자가 꿈에 나타나 춥다며 울었다. 사내는 다음날 여자가 묻힌 곳으로 다시 가서 낙엽을 쓸어모아 그 위에 덮었다. 그러고는 밤새 그 옆에서 소리죽여 울며 소주 다섯 병을 비웠다.

검사는 사내를 살인죄와 사체유기죄로 기소했다. 이 사건 변론을 맡으며 나는 무척 서글프고 안타까웠다. 별것도 아닌 일이 발단이 되어 한 여자가 죽었다는 엄청난 결과도 그렇거니와, 여자를 죽게 한 사내가 즉시 경찰에 신고만 했던들 '살인죄'가 아니라 '폭행치사죄' 정도의 훨씬 가벼운 처벌로 끝났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한편으로 또 무척 서운하고 야속했다. 아무리 내가 법정에서 사내에게는 여자를 죽일 마음이 없었으니 살인죄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사체유기행위가 살인죄 판단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겨우 '여자를 살해할 의사로 목을 조른 것'이 아니라 '여자가 사망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목을 조르고 얼굴과 몸통을 눌러 죽였다.'는 정도의 소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공소장이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어 달 뒤,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사내의 항소가 2심에서 기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문득 깨달았다. 사건을 냉정하게 바라보던 내 검사로서의 눈은 어느덧 흐려지고, 이제는 사건 뒤에 숨겨진 슬픈 사연이 먼저 가슴에 와닿는 변호사가 되어있다는 것을….

김 옥 철(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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