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세살배기 딸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 슬그머니 부끄러워진 일이 있다. 고작 대여섯 장밖에 안 되는, 글자보다 그림이 더 많은 책이었다. 의인화된 도꼬마리 아기와 명아주 아기가 폭풍이 치는 밤에 무서움에 떨다 마침내 먹구름이 지나가자 산 위에 걸린 무지개를 보며 얼싸안고 기뻐한다는 줄거리. 그런데 딸애는 길지도 않은 줄거리를 열심히 읽는 아버지의 가상한 노력도 몰라주고 내내 딴전만 피우는게 아닌가. 그러던 아이가 갑자기 번개치는 삽화를 가리키며 "우르르 꽝꽝, 아 무섭다" 이런다. 딴에는 내용은 몰라도 어린 나무 열매들이 껴안고 무서워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나보다.
그러고 보면 어린아이들의 표현력에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동심은 거추장스런 외형에 눈길을 빼앗기는 대신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저렇게 예쁜 표현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예전에 바이올린 교습소에서 만난 5살짜리 여자아이가 바이올린 활에 바르는 송진덩어리를 '바이올린 사탕'이라고 부르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런 깨끗하고 아름다운 눈을 계속 간직하게 해주고 싶다.
시인 안도현이 새 책을 냈다.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실천문학사 펴냄)'이라는 제목의 동시집이다. 안도현의 시를 읽어 보면서 느끼는 것은 천진함이다. 책 말미에 적혀 있듯, '좋아서 열심히 노는 아이의 심성처럼 천진난만함이 빛나고 그 사이로 절로 깨친 어떤 가치가 천연스레 드러나'기 때문이다. 시 한 편 한 편마다 그려진 삽화도 마치 초등학교 또는 유치원 아이의 그림처럼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느낌이다.
'풋살구, 라는 말을 들으면
풋, 풋, 풋,
입 속에 문득문득
풋살구가 들어와요
풋살구, 라는 말을 하면
살구, 살구, 살구,
입속에 자꾸자꾸
침이 생겨요
('풋살구 중')'
안도현의 동시는 말놀이 소재로 쓰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짧은 동시 안에 거창한 줄거리는 불필요하다. 언어를 통해 세상을 묘사하고 이해하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 이 책이 가진 미덕이다. 오늘 저녁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읽어줄 요량이라면 어른의 언어는 잠시 잊어도 좋을 것 같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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