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중 3학년 구갑필(15) 군은 10일 오후 여느 때처럼 학교 수업을 모두 마치자 노란색 축구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구 군은 3학년 남학생 23명으로 이뤄진 이 학교 '멀티플레이어반'에서 손꼽히는 공격수. 멀티플레이어반은 학교가 지난해부터 10~20명의 학생들을 선발해 축구, 농구, 럭비 등 다양한 종목의 운동을 가르쳐주거나 요가, 등산으로 심신을 단련하도록 지도하고 있는 방과후 프로그램이다. 취미교실 정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학생들 중 몇 명은 운동부가 아닌데도 올해 소년체전 예선 출전권을 따냈을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 멀티플레이어반의 탄생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심성을 변화시킨 학교 동아리
"전에는 학교가 가기 싫고 갑갑한 곳이라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학교를 마치면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더 좋았죠. 그러던 제가 이젠 오전 7시부터 교문을 지키는 전교 선도부장이라니 믿어지세요?"
구 군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굵은 땀을 훔치며 싱긋 웃었다. 이렇게 순박한 웃음을 지닌 학생이 1년 전까지만 해도 교사들로부터 요주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공부가 재미없고, 학교에 가기 싫어하던 구 군이 모범생으로 변한 것은 지난해 멀티플레이어반이 생기면서부터. 새로 부임한 김홍주 현 교장이 교사들과 뜻을 맞춰 함께 만든 '작품'이다.
"우리 학교는 생계형 맞벌이 가정이 많고, 도·농복합 지역에 위치해 있어 교육환경이 좋은 편이 아닙니다. 이렇다 보니 학교 규정을 위반하거나 수업에 흥미를 못 느끼는 학생들도 상대적으로 많은 편입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칭찬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계속 꾸중만 한다면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 인정받을 기회를 줘야지요."
이런 김 교장의 생각을 반영한 멀티플레이어반은 보통의 방과후학교와 성격이 다르다. 영어, 수학 등의 교과 심화나 재미를 위한 취미강좌가 아니라 좋아하는 운동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인성을 순화시키는 프로그램이다. 자연히 그 대상은 구 군처럼 학교 수업에 흥미를 붙이지 못하던 학생들. 2년째 이 반을 끌어가고 있는 유진권 체육교사는 "무엇보다 아이들의 표정이 엄청나게 밝아졌다."며 "교사를 피하던 아이들이 자신감에 차 있고 수업 태도도 좋아지고 있다."고 놀라워했다.
멀티플레이어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운동을 한다. 매주 월·화·목·금요일 4일 동안 육상이나 구기종목을 통해 기초체력을 기르고 테크닉, 경기 전술 등을 배운다. 1일 한 시간으로 정해져 있지만 운동의 재미에 푹 빠진 학생들은 정해진 시간을 넘기기 일쑤다. 수요일에는 순회 상담교사로부터 가정이나 학교 생활의 어려움은 없는지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금요일에는 3명씩 6개팀으로 나눠 실전에 버금가는 축구경기를 펼친다. 요즘에는 다음달 9일 열리는 교육감배 체육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맹연습을 하고 있다. 이들 중 2명은 올해 소년체전 달성군 대표로 뽑혀 단거리와 5,000m 시합에 출전한다. 유 교사는 "매달 말일에는 멀티플레이어반 학생과 학부모, 교사가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갖고 있다."며 "집에서도 많이 밝아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전했다.
이처럼 남학생 중심의 심성변화 프로그램이 성과를 거두자, 학교는 올해 여학생들만을 위한 '아트테라피반(Art-therapy)'을 신설했다. 여학생들이 좋아하는 미술을 소재로 마음을 표현하고 다양한 만들기를 통해 자신과 주변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키워가는 치료 프로그램. 역시 주 4일 미술 수업을 하고 수요일에는 집단상담을 받는다.
류진희(미술) 아트테라피반 담당 교사는 "한 학생이 자기와 가족의 모습을 기괴하게 표현한 콜라주(종이를 찢어 붙여 만든 그림) 작품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현재 자기의 심정을 나타낼 만한 단어를 고르라고 했을 때도 '답답하다', '심각하다', '의욕이 없다'는 부정적인 대답이 많아 안타까웠다."고 했다. 류 교사는 "내면에 그런 그늘을 짊어진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단지 학업에 충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늘 주눅들어 지냈을 것을 생각하면 따라다니며 도와주고 싶은 심정이 든다."고 진심을 내비쳤다.
첫 수업 때만 해도 낯설어했지만 학생들은 이제 류 교사를 언니처럼 따르고 있다. 그는 이 반을 맡고부터 미술치료를 위해 따로 연수를 받고 책을 찾아 공부를 하고 있다. 둥근 원 안에 자신의 심상을 표현하는 '만다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던 2학년 임수진(14) 양은 "(류 선생님은) 늘 언니처럼 대해주셔서 마음이 편하다. 그림에 집중하다 보면 그동안 속상했던 일이나 잘못했던 일에 대해 위안을 얻거나 반성하는 마음,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화원중은 내년에 새 강좌를 열 계획이다. 사랑의 텃밭 가꾸기. 김 교장의 표현대로라면 노작(勞作)을 통한 심성치료다. 벌써 학교 앞 산에 7, 8평짜리 밭도 빌려놨다. 김 교장은 "씨를 뿌리고 가꾸고 수확하면서 아이들 스스로 마음의 밭을 일구게 하자는 목적"이라고 말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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