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차(기차) 안에서는 휴대전화 벨소리를 진동으로 해주시고 통화를 할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있는 공간에는 반드시 귀가 따갑게 울리는 벨소리가 있다.
벨소리가 나는 전화기의 주인은 대체로 동작이 느려서 전화기를 찾는 데 한참 걸린다. 축적된 소리를 한꺼번에 몰아서 내보내는 듯 "여보세요!"하고 전화를 받는 목소리도 웅장하다. 대다수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과반수 이상은 그러하다.
통화가 계속되는 동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전화를 받는 사람의 사생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요점은 그가 반말과 욕설을 많이 쓰는, 정신적으로는 사춘기의 학생 수준을 맴도는 사람이며 그의 상대 역시 비슷한데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통화 내용을 예를 들면 이렇다.
"어디야? 왜 벌써 가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가는 중이야. 어디긴 어디야. 지하철 안이지. 거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어." 주변 사람은 물론 좀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왜 상대가 전화를 걸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약속시간보다 먼저 도착한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거나 심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별 내용이 없다. 하다못해 바깥에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에 관한 정보조차 없다. 천만다행스럽게도 전화기의 주인이 끊으라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심심하거나 자랑을 하기 위해서 건 사람이 쉽게 끊을 리가 없다.
전화는 계속된다. 이런 사람들의 삼분의 일 이상은 웃음소리도 말소리에 어울리게 크고 스스럼이 없어서 '하하하' 스타일이 아니라 '오와아핫핫' 하는 식이다. 큰소리를 잘 참아내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그의 말소리가 안 들리는 곳으로 피해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 가끔 어디로 가기가 어렵게 사람들이 차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어렵사리 다른 칸으로 간다고 해서 비슷한 사람이 없으라는 법도 없다. 어쩌면 더 큰 목소리와 배짱을 가진 사람이 저마다 전화기를 들고 통화를 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소리를 안 들으려고 상상을 시작한다.
저 사람은 한국어로 통화를 하고 있고 한국에 있긴 하지만 다른 세계의 문화권에서 살다 온 사람이다. 이를테면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되도록 서로 멀리 떨어져 생활하는 나라라거나 예의가 바른 말씨를 쓰면 바보 취급을 하는 행성에서 왔다.
아니면 극소수의 귀족과 특권층 외에 다른 사람들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으며 귀와 뇌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람이다. 물론 그는 그 시대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무지렁이 계급에 속했다.
또는 그는 어릴 때부터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장소나 학교에 가보지 못하고 자랐다고 상정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 상상을 마치고 나서 그를 보면 어쩐지 안 되어 보이고, 통화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 자기 현시를 위한 안간힘처럼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그의 깨끗해 보이지 않는 생김새나 단정치 못한 옷차림, 끊임없이 손발을 떨어대거나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는 그런 것들이 당연시되는 세계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살다가 불운하게 이 나라로 떨어져서 자신과 비슷한 운명을 가진 사람을 만나러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운명이 지하철에서 사적이고 무례한 언사로 큰 소리를 내며 통화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는 대단히 적을 것이다. 그런데 기이한 운명을 가진 한 사람의 전화 통화를 참아내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지하철공사나 철도청은, 지방자치단체나 국가는 성능 좋은 귀마개를 지하철과 기차에 비치할 계획은 없는가?
아니면 비슷한 사람들이 같은 칸에 타서 동질감을 확인하고 우의를 다질 수 있도록 목소리 큰 사람들만을 위한 전용칸을 만들 의향은 없는가. 왜 조물주는 불필요한 말을 듣지 않아도 되도록, 귀마개 같은 기관을 귀에다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으려 할 때 쓰도록 눈꺼풀은 만들어 주었으면서…?
성석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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