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과 전공의 수련 시절의 일이다. 50대 초반 남자가 멍이 잘 들고 피곤한 증상으로 진료를 받으러 왔다가 혈액 암으로 진단받고 입원했다. 그는 작은 개인 사업을 하느라 자기 몸 돌볼 겨를도 없이 일만 해온 평범한 남편이자 아직 어린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입원 치료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백혈구 수치는 점점 떨어져 감염 예방을 위해 격리 병실로 옮기게 되었다. 환자는 그동안 숱한 고생 끝에 모은 돈으로 이제 겨우 자그마한 집을 장만해 며칠 뒤 이사할 예정이었다. 일 때문에 늘 밤늦게 귀가하다 보니 어린 자녀들과 제대로 외식 한번 못해 본 걸 아쉬워하는 환자의 눈빛에는 마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을 스스로 예견하고 있는 듯했다.
어느 날 아침 교수님과 함께 회진을 갔더니 환자분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아내와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그동안 벌어 놨던 전 재산을 다 날려도 좋으니 제발 살려 달라며 애원했다. 환자의 이런 사정이 너무 안타까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돌보고 있던 중, 어느 날 환자가 주치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이 왔다. 오늘 아내와 아이들이 새로 살게 될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내가 이 병원에서 살아 나갈지 죽어 나갈지 모르니 가족이 살 집이 어떤 집인지, 애들 방은 어떤지,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으니 내일 외출을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가족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환자의 삶 속에서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순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보다는 환자의 신체적 질병만을 상대로 냉정한 투쟁을 해온 나의 짧은 판단으로 "현재 환자 상태는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아 언제 감염이 될지 모르며 건강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가벼운 감기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어서 외출은 절대로 안 되며 항암 치료 뒤 경과가 호전되면 외출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설득했다. 그런 뒤 실망스런 환자와 아내의 눈빛을 뒤로 한 채 다른 일을 위해 주저 없이 그 자리를 일어섰다.
그러나 다음날 환자는 갑자기 고열이 나면서 혈압이 떨어지고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나와 담당 교수님 및 간호사들의 집중적인 치료와 간호에도 불구하고 환자와의 전날 약속은 결국 지킬 수가 없게 돼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환자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었을 텐데." 하는 극심한 후회와 자책으로 그날 환자의 시신과 가족들을 떠나보내며 혼자 눈물 흘렸다. 대학 교수 시절 학생들에게 병력 청취와 환자와의 대화 기법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empathy(공감)와 sympathy(동정)의 차이에 대해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환자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는 하되 환자에 대한 연민으로 이성을 잃고 환자와 같은 감정에 흔들려선 안 되며 의사로서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 이성적인 판단에 치우친 나머지 환자의 질병만을 보고 진정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환자의 삶 전체를 이해해 주지 못해 환자를 대하는 데 소홀한 면이 있지는 않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종합병원이라는 삭막한 건물 속에 갇혀, 창문 너머로 햇볕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들조차 부러웠던 전공의 시절, 나에게 환자를 돌보는 의사로서의 겸허함과 따뜻한 마음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그 50대 가장이 눈시울을 젖게 한다.
윤현대(라파엘내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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