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남편 잃고 세 남매 키우는 김이순씨

8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이어서 이제는 가슴 속에 묻었으리라 생각했다. 늦은 밤 퇴근길을 달려오던 남편은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영원히 아내와 세 자녀 곁을 떠났다. 이튿날 새벽 5시쯤 집으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고 병원 응급실로 내달았을 때만 해도 하얀 천으로 덮혀있는 남편의 모습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고였다. 커브길에서 남편은 마치 직선도로를 달리듯 차를 몰았고 커브길 바깥쪽 담벼락을 들이받고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보험금 2천만 원이 남편이 남긴 전부였다.

큰 딸 유진(가명)이 11살, 작은 딸 아연(가명)이 5살, 막내 아들 태형이가 갓 8개월을 넘긴 때였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직장생활하는 남편과 미용실을 하는 김이순(45) 씨는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두 딸의 재롱은 물론이거니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를 보는 즐거움에 부부는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 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더 이상의 행복은 허락되지 않았던 것일까? 남편을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내고 일년 쯤 지난 뒤 막내가 앓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벼운 감기쯤으로 여겼다. 남편 없이 생계만 꾸려나가기에도 벅찼기에 온전히 신경을 쓰지 못했다. 게다가 의약분업을 둘러싼 파업으로 병원 응급실조차 문을 닫았던 그 때. 막내 태형이는 한참을 앓고나서야 비로소 '가와사키병'으로 불리는 급성 전신성 혈관염 판정을 받았다. 한달간 입원하면서 38℃ 이상 고온으로 신음하던게 20일 이상이었다. 겨우 치료가 끝나서 한숨 돌리려는 순간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다. 막내가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자폐증을 의심했다. 동네에서 인사 잘하기로 소문났던 21개월의 태형이.

무엇이 원인인지 몰라도 아이는 병을 앓고난 뒤 청각을 상실했고 동시에 말도 잃었다. 어떻게든 말을 되찾아주고 싶었던 엄마는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서울에 한 병원이 용하다는 말을 듣고 몇 번 올라갔지만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생계도 막막하고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두 딸도 걱정이었다. 보청기를 착용하고 말 연습을 시작했지만 회복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아!' 소리를 내라고 해도 입맛 벙긋거릴 뿐 소리를 내지 못했다.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그나마 둘째 아연이가 학교에 들어간 뒤 본격적이 재활치료에 들어갈 수 있었다. 3년 전쯤 인공 귀를 다는 수술을 했다. 그제서야 태형이의 말문이 터졌다. 언어재활치료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시간당 몇 만 원이 드는 치료비를 감당하느라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한창 사춘기를 지나고 예민해질 수 있는 두 딸도 그런 사정을 아는 지 별 탈없이 무럭무럭 자라주었다. 유진이는 고등학교 3학년, 아연이는 중학교 1학년이다. 막내도 또래 친구들과 아무런 차이를 느낄 수 없을만치 말을 할 수 있게 됐고, 한 살 아래 친구들과 함께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다. 얼마 전 치른 중간고사에서 수학 한 문제를 틀렸다며 너무 아쉬워했다. 지난 8년의 세월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저 아득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남편의 부재가, 아버지의 공백이 너무나 커서 혼자서 눈물을 훔친 적은 얼마나 많았던가. 아직도 그 빈 자리를 채워지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행히 아이들 한 명당 매달 20만 원씩 교통안전공단에서 생활자금 무이자 대출이 가능해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빌려쓴 돈만 5천만 원이 넘는다. 지금 살고 있는 대구 달서구 장기동 장기주공아파트도 전세자금 대출로 마련했다. 하지만 김 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죠. 행여 도움의 손길이 온다면 더 어려운 분들에게 주세요. 저는 조만간 여동생과 함께 미용실을 다시 시작해볼 생각입니다. 우리 집 사연은 교통사고가 얼마나 무서운 지 깨닫게 하는 정도면 감사하겠습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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