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종문의 펀펀야구] 코치입문 '헐크' 사발주 신고식

1997년 겨울은 이만수에게 시련의 연속이었다. 서정환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 사령탑을 맡으면서 은퇴했는데 이후 코치 연수 문제가 꼬이면서 심기가 어지러웠다.

당시 개인적으로 코치 연수를 추진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무턱대고 가봐야 견학을 하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연줄이 없으면 정식 코치 연수가 불가능해 이만수는 막막한 심정으로 몇 달을 보냈다. 야구를 그만두고 목사의 길을 가려고 생각한 것도 이 때였다.

이듬해 2월 이만수에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통지서가 날아왔다. 대구상고 시절 스승이었던 정동진 감독의 청탁을 받은 앤디 킴(당시 미국 에이전트사 직원)이 주선, 시카고 화이트삭스 산하 애크론애로스에서 타격 및 훈련담당 코치로 연수을 떠날 수 있게 된 것. 통지서를 들고 대구까지 내려온 이는 다름 아닌 정 감독. 마음 고생이 심했던 제자에게 기쁜 소식도 알릴 겸 앞서 6개월간 미국 연수를 다녀온 경험(1991년)도 얘기해주고 싶어서였다.

필자를 포함한 세 사람이 대구시 수성구 경남타운 근처 골목의 작은 횟집에서 축하연을 벌였다. 그런데 이날 따라 정 감독은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 이만수에게 잔을 내밀었다. 연수를 주선한 대가로 이날 만큼은 술을 마시라는 것이었다. 몇 번의 독촉과 엄한 눈총 끝에 이만수가 술잔을 들었다.

소주 한 병을 비우자 정 감독은 큰 사발 그릇을 가져와서 소주를 통째로 따르곤 자신이 먼저 한잔을 마신 뒤 이만수에게 권했다. 잠시 망설임 끝에 이만수가 단숨에 사발을 비워 버렸다. 이렇게 해서 사제지간 술대결이 벌어졌다. 몇차례 주거니 받거니 하다 양주까지 주문하게 됐다.

"왜 술을 이렇게 많이 주세요?" 잔뜩 취한 듯 상기된 얼굴로 이만수가 물었다. 눈꺼풀이 지긋이 내려간 정 감독이 말했다. "이제 넌 코치로서 첫발을 내딛는 것이 아니냐. 코치 초년생에게 주는 선물이지. 선수 시절 넌 술을 마시지 않았지. 그래서 술 취한 사람의 심정을 모를 거야. 네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술 마시는 사람의 심정을 모른다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겠니? 코치가 되면 선수의 마음을 잘 헤아려야 하는데…. 이 술은 뭐 그런 뜻이야…."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지도자로서 야구, 가정, 신앙이 전부였던 이만수에게 닥칠 험난한 세파가 염려스러웠던 것일까? 말끝을 흐리던 정 감독의 고개가 술 기운에 꺾였고 축하연은 끝났다. 화장실로 가서 찬물로 세수를 한 이만수는 정 감독을 등에 업고 씩씩하게 집으로 돌아갔고 한달 뒤 미국으로 떠났다.

며칠 뒤인 22일 이만수가 온다. 비록 SK로 유니폼을 바꿔 입긴 했지만 지도자가 되어 10년 만에 대구구장에 온다. 얼마나 변했을까? 마시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시지 않아서 아무도 몰랐던 이만수의 주량처럼 10년 동안 이만수의 깊이도 얼마나 더 깊어졌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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