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광장] 고정희 시인이 남긴 여백

-'고정희 청소년 문학상 백일장'에 부쳐

청소년 백일장은 입시와 경쟁 속에 찌들린 작가 지망생들에겐 가뭄에 내리는 단비와 같다. 백일장은 특히 청소년들에겐 작가라는 꿈을 꾸면서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만나 함께 실력을 겨뤄보기도 하고, 자극을 받기도 하고, 문학적 감성과 상상력을 키워나갈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황석영도 고등학생 시절 등단을 했고, 작가 은희경이나 안도현도 청소년 시절 여러 백일장을 휩쓸고 다녔던 문인들이다. 5월을 맞아 전국적으로, 특히 광주에는 여러 백일장이 열리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대구지역에서는 그런 장이 흔하지 않다.

그래서 '또 하나의 문화'와 '고정희 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대구여성회가 주관한 고정희 청소년 문학상 백일장 대구·경북지역 예선은 여러 의미에서 뜻 깊은 자리다. 고정희는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에서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고 노래했다.

2007년 강릉 서울 대구 김해 제주에서 5월 5일 동시에 열린 고정희 청소년 문학상 백일장은 바로 시인이 남긴 그 여백의 틈으로 들어가 그가 닦아 놓은 문학의 길 위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일이다. 민중과 여성과 사랑의 슬기와 섬세함이 고독과 분노를 다스려 닦은 길인….

시인이 죽음 뒤에 남긴 여백은 우리에게 두 가지 문학적 과제를 남긴다. 하나는 문학이 여성의, 인간의 한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구조의 전형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하는 리얼리즘에 관한 과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고정희 시인이 못다 했던 여성해방문학이라 이름 부를 수 있는 작품세계가 양과 질에서 풍성해지는 것이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고정희 문학제는 이러한 문학적 과제들을 풀어나가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연분홍 연초록 새잎들에 얼룩진 황사와 공해의 찌꺼기들을 씻어내 갈 봄비가, 소나기와 만나 도도한 강물을 이룰 것을 기다리고 또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시인이 남긴 여백은 문학 밖에서 또 하나의 주제를 던져준다. 만약 고정희 시인이 자신의 여성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람이었다면, 혹은 시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여성의 문제의식에 집중했다면 그녀가 시인들의 무리 속에, 남성권력화된 문단에 소속될 수 있었을까?

굳이 '여성'임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민족문학작가들의 대류에 합류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런 저런 생각들이 나를, 그녀를 씁쓸하게 한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독재와 폭력에 저항하는 한 실천하는 지성인으로서만, 남성 문인들은 고정희의 반쪽만을 이해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여성'은 '누이'로 이름 불리며 동지나, 페미니스트라는 공적 영역에서가 아닌 사적 관계 안에서 용인된다. 우리가 한용운이나 고은 시인을 형이나 오빠로 부르지는 않지 않는가!

고정희 시인이 남긴 여백에는 죽은 시인의 노래를 이어 부르고, 여성해방문학의 문체를 찾아가고, 여성들의 문학에 정당한 이름을 붙여주는 일들이 살고 있다. 그 여백에서 우리는 그녀가 못다 한 사람 사는 세상을 또 다른 목소리로 노래할 것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다수의 목소리에 눌려 외쳐도 소리 들리지 않는 소수에게, 말을 주고, 귀를 열어주는 노래를 부르는 곳. 하여 이 여백은 지금은 작은 골목길일지 모르지만 곧 큰 길이 되고 소통과 이해의 중심인 광장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

내년에는 더 많은 지역이 참가하고 더 많은 청소녀, 소년들이 생기 가득한 눈 빛내며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던지고 우리를 향해 도전해오기를. 다른 목소리로 온갖 이름조차 없던 것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기를. 하여 '아버지의 질서'에 생채기를 내고 그 언어의 감옥에서 빠져나오기를. 자유하기를. 아버지의 언어에 갇힌 나 또한 풀어주기를……바라고 또 바란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에게 자기 안에 숨죽여 있는 힘과 창조자들을 일깨우는 축제가 되기를…. 해마다 이맘때면.

이은주(문화평론가·대구여성회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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