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2009년 상반기에 5만 원과 10만 원권 화폐를 발행한다고 밝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과 논란거리를 만들고 있다. 그동안의 물가와 국민소득 상승 정도를 감안하면 고액권 발행은 때늦은 감이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부작용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우려가 나온다. 고액권 발행과 관련해서는 필요성과 예상되는 부작용 등 시시비비를 따져보는 것과 함께 화폐에 들어가는 인물과 도안의 의미, 리디노미네이션 등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게 좋다.
▨ 고액권 발행 늦었다
현재 우리나라 최고 액면 금액 화폐는 만 원권이다. 1973년에 발행된 이후 물가는 12배 올랐고 국민소득은 150배 올랐다. 이로 인한 불편과 낭비는 현실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고액권 발행의 필요성에 대해 국민 다수가 공감하는 이유다. 거둘 수 있는 이득도 여러 가지다.
'고액권 발행은 한국경제의 좁은 혈관을 터주는 것은 물론, 다양한 긍정적 효과를 동반할 것이다. 연간 10억 장가량 유통되는 10만 원 짜리 자기앞수표를 대체하고, 기존 1만 원권 수요를 일부 흡수할 경우 연간 3천200억 원을 아낄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한은이 거둘 연간 1천700억 원가량의 주조 차익이 정부의 재정수입으로 이어질 것임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시민과 상공인이 실생활과 상거래에서 10만 원 짜리 수표를 사용하면서 겪어온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이점 또한 여간 크지 않을 것이다.'(신문사설)
위의 좁은 혈관이라는 표현은 작은 화폐단위로 인해 결제가 불편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흘러가는 거래단위와 규모가 커진 만큼 물길의 크기를 결정하는 화폐단위도 커져야 한다는 것이다.
▨ 부작용 충분히 고려해야
고액권 발행으로 인한 부작용도 이득 못지않게 큰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개개인 입장에서는 돈 가치에 대한 심리적 착시 현상에 빠져 과소비로 이어질 가능성이 생긴다. 이는 물가 인상으로 직결된다. 추적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음성적인 자금거래를 부추길 여지도 크다. 부패와 탈세 가능성도 쉽게 예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국가청렴위가 한국은행의 고액권 발행 추진에 대해 시기상조라며 날카롭게 견제하고 나섰다. 청렴위는 우선 고액권 발행 근거가 취약하다고 꼬집었다. 발행연도 대비 소비자 물가 상승이 뉴질랜드는 14배, 미국·스위스는 10배 이상 이뤄졌다는 것이다. 잔돈을 바꾸는 불편이 커진다는 점도 지적했다. 아울러 "고액현금거래보고 제도 보완과 뇌물 및 불법정치자금 수수에 대한 적발·처벌 강화 등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액권 발행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큰 만큼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은 발행 자체를 반대하기보다 시기를 늦추고 보완책을 제대로 마련하자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너무 서두를 일은 아니다. 신용카드 사용이 일반화하면서 고액권 필요성이 과거보다 준 만큼, 한두 해가 급할 정도로 절박하지는 않다. 고액권 발행 때 예상되는 부작용을 면밀히 따져 미리 충분한 대책을 세우는 게 더 중요하다.(중략) 정부와 한은 모두 대책을 마련하는 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여건이나 대책이 충분치 않다면 실행을 좀 늦춰도 문제가 없다. 세간의 걱정을 한낱 '기우'로 치부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신문 사설)
▨ 화폐단위가 아니라 관행 문제
고액권 발행에 따른 여러 문제점은 각기 나름의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가령 위조지폐가 만연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현재의 기술력으로도 대비가 된다는 식이다. 탈세와 불법에 대해서도 고액권에 책임을 물을 게 아니라 사회 제도와 관행 개선에 힘을 모으면 방비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고액권 때문에 부패와 탈세가 늘어난다는 발상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부패와 탈세는 사회의 투명성을 높이고, 부정행위에 대해 엄정한 사법처리를 함으로써 바로잡을 일이지 불편한 화폐 제도를 고집해 해결될 일이 아니다. 고액권의 액면가가 우리나라보다 높은 선진국에서 이 때문에 부패와 탈세가 만연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신문 사설)
대부분의 주장들은 남은 2년 동안 정부와 한국은행이 고액권 발행의 부작용을 줄이라는 점잖은 요구로 모아지고 있다. '정부는 탈세와 불법 거래를 줄일 수 있도록 인터넷 결제나 신용카드 결제를 지금보다 더 활성화시켜 현금 거래 비중을 낮추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현금 거래의 경우 반드시 현금등록기를 통한 영수증을 주고받도록 제도적 보완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한국은행은 지금보다 인플레이션을 좀더 낮추고 돈의 가치를 지킬 수 있도록 정책의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신문 칼럼)
▨ 화폐 디자인 논란
새 5만 원권과 10만 원권 발행에 대해서는 발행 자체보다 디자인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둔 논란이 더 뜨겁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도안을 사용하고 어떤 인물을 넣을 것인가에 대해 한국은행이 여론조사를 벌이기로 하면서 각계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을 넣으라는 의견 제시를 넘어 단체 차원에서 집단적인 움직임까지 보이며 과열 양상으로 빠져들고 있다. 흥사단이 도산 안창호 선생을, 백범기념사업회 등이 백범 김구 선생을, 여성계가 신사임당이나 유관순 등을, 과학계가 장영실 등을 내세우는 형태다.
경쟁은 화폐가 가지는 상징성에서 비롯된다. '화폐에 들어가는 인물이나 도안은 우리의 가치관·세계관·역사관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인물·유물·자연의 모습을 사용한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화폐는 우리 모두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신문 칼럼)
우리나라의 기존 화폐는 등장인물이 조선시대 남성에 편중됐다는 비판을 받아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외국의 경우는 과학자, 시인, 음악가, 소설가, 건축가 등 다양한 직업군에서 인물을 선정한다. 또한 일본이나 프랑스의 경우는 자국의 위상을 높여준 여성을 과감히 선정했다. 화폐를 보면 그 나라의 정치 경제적 상황이나 문화적 수준을 평가할 수 있다.'(신문 칼럼)
어떤 인물을 넣을 것이냐만 따지는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도 당연히 제기된다. '굳이 인물초상에 집착하여 과거의 역사적 인물 찾기에만 매달릴 필요가 있을까? 앞으로 나올 고액권 원화에 이 다이내믹 코리아를 상징하는 눈에 확 띄는 디자인이면 어떨까. 실제로 달러화와 필적하는 세계적인 통화 유로화의 경우 인물초상 대신 유럽지도를 배경으로 앞면은 유럽식 창과 문, 뒷면은 유럽식 교량의 건축문화를 상징하는 디자인을 택하고 있다.'(신문 칼럼)
▨ 리디노미네이션 논란
고액권 발행과 관련해 짚어볼 문제는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다. 화폐의 가치 변동 없이 단위만 바꾸는 것을 말한다. 가령 1천 원을 1원으로 바꾸고 그에 맞춰 모든 화폐를 바꾸는 방식이다. 거래 단위가 지나치게 큰 국가에서 그 불편을 해소하고 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도입하는 정책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각종 거래 단위와 통계가 조(兆)를 넘어 경(京) 단위에 육박하면서 필요성에 대한 논란이 조금씩 번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고액권 발행을 발표하면서 리디노미네이션은 없다고 밝혔지만 중장기적 과제로는 검토할 필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국제통계도 기껏해야 조 단위에 그치지만 작년 한은의 결제액은 3경(京) 원이 넘었다. 0이 16개나 붙어 읽기조차 힘들다. 이는 또 국가의 위상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미국 달러화를 1천 원 안팎의 환율로 교환하는 통화는 원화 하나뿐이다. 화폐단위 변경의 방법, 시기, 절차에 대한 논의를 마냥 미룰 일은 아니다.'(신문사설)
한국은행이 우려하는 이유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화폐 단위를 줄이면 고액권 발행보다 심리적 착시 현상이 훨씬 심각하기 때문에 소비 과다, 가격 상승에 대한 저항감 상실 등 여파는 비교할 정도가 아니다. 화폐단위 변경으로 인한 화폐 발행, 회계 변화, 전산 및 통계 자료 교체 등에 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2조~3조 원에 이른다는 점도 부담이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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