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이 있는 길)찾지 못한 마음의 한 자락 - 도종환의 '미황사 편지'

보길도를 떠나 완도를 거쳐 다시 해남으로 들어섰다. 완도에서 해남 방향으로 보면 바다 건너 아름다운 산자락이 나타난다.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이다. 차는 위태롭게 달마산을 오른다. 달마산 산자락에 우리들 삶의 모습처럼 위태롭게 들어선 아름다운 절집, 미황사로 가는 길이다. 미황사는 위도상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해 있는 절이다. 1692년(숙종 18)에 건립된 '미황사사적비'에 기록된 창건 연기 설화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8년(749)에 창건되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천년고찰이라 할 수 있다.

신라 경덕왕 8년(749) 홀연히 한 석선(石船)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에 와서 닿았다고 한다. 배 안에서 천악범패(天樂梵唄)의 소리가 들리자 어부가 살피고자 했으나 배가 번번이 멀어져 갔다. 의조화상이 이를 듣고 장운·장선 두 사미와 촌주 우감, 향도 100인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비로소 석선이 해안에 닿았는데, 그곳에는 주조한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향도들이 경전과 부처님 상을 해안에 내려놓고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 때 흑석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문득 커졌다. 이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 왕으로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경상(經像)을 모실 곳을 구하고 있는데, 이곳에 이르러 산 정상을 바라보니 1만불(一萬佛)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소에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經)을 봉안하라."고 일렀다. 이에 의조화상이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가다 처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누워 사찰을 창건하니 곧 통교사요, 뒤에 누워 죽은 골짜기에는 미황사를 짓고 경과 상을 봉안했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취한 것이고, '황'은 금인의 황홀한 색을 취한 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길을 올랐다. 바위가 병풍처럼 늘어선 달마산 구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아늑한 절집, 풍경 소리가 경내에 가득했다. 대웅전 앞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모습도 절경이었다.

지난해 도종환 시인이 시 배달 이야기를 위해 대구에 오셨기에 강연을 들으러 갔다. 자필 사인이 담긴 시집도 한 권 선물로 받았다. '해인으로 가는 길', 화려하지 않은 표지가 더 깊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좋아했던 시인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지켜본 시인은 이미 삶의 전부를 알아버린 듯 깨달은 자의 모습이었다. 갑자기 다가온 몸의 정지신호 때문에 꼬박 1천 일을 산에서 혼자 지낸 시간의 흔적이었을 게다. '퍼붓는 눈발처럼 다 쏟아부었던 한 시대는 진창이 되어 질척거리고,/ 절규도 그만 눈 속에 묻혀 지워지고,/ 절절하게 울어야 할 것들은 오지 않아/ 바람이 대신 나뭇가지를 붙잡고 우는 거겠지요./ 자기가 알던 사람들의 귀를 잡고 진종일 우는 거겠지요.'(시인의 말, '산방에서 보내는 편지' 부분) 마음은 사라지고 언어만 남은 요즘의 시들, 독자들을 위한 시가 아니라 시인들의 시가 되어버린 요즘의 시편들과는 달리 퍼붓는 눈발처럼 쏟아부었지만 진창이 되어버린 진실에 대한 시인의 아픔을 담은 시편이 절절히 가슴으로 다가왔다.

혼자 있는데도 더불어 살아간다는 걸 깨달은 시인. 이미 시인은 해인(海印)의 세계에서 화엄(華嚴)의 세계로 건너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인이 현실을 버린 것은 아니다. 진정한 화엄의 세계는 현실에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시집에 담긴 시인의 시편들 중에서 해남 미황사에서 보낸 편지가 가장 가슴으로 다가왔다. 그해 겨울 어렵게 들렀던 미황사에서 풍경에 취해 걸음을 옮기지 못했던 내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달마산 그림자가 내 영혼에 스며들 즈음 나는 사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마음의 공허만 얻은 채 미황사를 떠났더랬다. 다시 그곳을 간다면 찾지 못한 내 마음의 한 자락이나마 찾을 거라는 작은 희망으로 시인의 '미황사 편지'를 다시 읽는다.

'언제쯤 무명의 밤이 지나고/ 적멸의 새벽을 맞이하게 될까요/ 새도 달마산도 별도 사람도 맑고 고요해져/ 자기 자리를 찾아가게 될까요/ 그대 먼저 길을 찾아가시면/ 부디 발자국 하나라도 남겨주세요/ 그대 발에 밟혔다 누운 풀잎을 흔들며/ 그 뒤를 따르겠습니다.' (도종환, '미황사 편지' 부분)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 도종환의 '해인으로 가는 길'

'접시꽃 당신'으로 유명한 도종환 시인의 2006년도 시집 제목이다. 몇 년 전 지병으로 삶의 터전인 교단을 떠나 주위를 안타깝게 했던 시인이 산속에 지은 집인 구구산방(龜龜山房)에서 세 해째 '세상으로부터 생략되어', '지워지는 시간'(도종환, '산방에서 보내는 편지') 속에서 마치 '망명정부'를 세우듯 써내려간 작품들을 모은 시집이다. 아픈 몸과 지친 마음을 이끌고 시인은 삼 년 전 아무 말 없이 산으로 올라갔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듯 가끔은 스스로가 측은해졌지만 이내 다시 익숙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시집의 처음을 지키고 서 있는 시 '산경'은 그저 하루 동안의 일을 말하고 있으나 그 동안 시인이 일구어온 시간의 내부를 정직하게 보여준다.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이게 시인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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