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경조사비

옛날 이야기다. 한 친구가 독학으로 경찰관이 됐다. 그는 결혼을 앞두고 회심의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청첩장 1만 장 돌리기였다. 순경으로 불과 몇 년간 몇 군데 파출소를 옮겨 다닌 경력이 전부였지만 그는 감히 자신의 결혼식을 절호의 한탕벌이 기회로 삼았다. 가깝거나 멀거나 상관없이 선후배, 친구부터 챙겼고, 한번이라도 만난 사람 또한 빼먹지 않았다.

최고의 황금바다는 자신의 경찰 연고지였다. 근무중인 파출소 관할 구역뿐 아니라 거쳐간 모든 지역을 망라했다. 식당, 카바레, 구멍가게, 노점상 등 크고 작은 영업장을 몇 달 동안 샅샅이 누볐다. 대부분 일면식도 없었으나 '예전에 이곳에서 근무했던 아무개'라는 넉살을 부리며 청첩장을 건넸다.

그의 프로젝트는 대성공을 거뒀다. 축의금 수입은 당시 괜찮은 집 한 채를 사고도 남았다. 그뿐만 아니라 넘치는 하객들로 인해 전도유망한 경찰로 알려졌다. 고향에서는 참석한 친척'친구들의 목격담에 의해 성공신화의 주역처럼 한동안 회자됐다.

권위주의시대, 김선달처럼 한국적 결혼식 풍조의 허를 찌른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 시골 붙박이로 살아온 한 친구는 몇 달 전에 딸을 시집보내면서 청첩장을 만들지도 않았고 가까운 친구에게 전갈조차 하지 않았다. 친척과 신랑'신부의 우인들만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지인들의 경조사에 빠짐없이 다녔지만 고래의 십시일반, 상부상조의 의미는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축의 없는 하객과 부조는 소용이 없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축의금 부담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혼잡스런 결혼식이 결코 아름답지도 않고 축복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경조사비가 7조 2천700억 원, 가구당 50만 8천 원꼴이라는 통계가 나오자 경조사비의 폐해가 다시 부각됐다. 한국 특유의 경조사 문화에 모두들 발목이 잡힌 꼴이다. 특히 결혼식'돌잔치 등 경사는 상당수 합법적인 금전 거래와 허세 과시의 장으로 변질됐다. 개선돼야 한다. 실마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있다. 잘나가는 사람들이 경조사비의 연결고리를 먼저 끊는 것이 해법이다. 그것이 아쉽다면 잘나가는 사람들끼리만 청첩하는 것도 궁여지책의 하나가 될 것이다.

김재열 논설위원 soland@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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