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이 시대의 뛰어난 아동 문학가이자 성자처럼 거룩한 삶을 살았던 권정생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선생은 70년의 고단한 삶을 마감하고 영원한 안식에 들었지만, 우리 모두는 큰 스승 한 분을 잃었습니다. 욕심이 미움을 낳고 미움이 폭력을 낳는 이 시대에 선생의 깨끗한 삶은 우리에게 진정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되묻게 합니다.
권정생 선생은 '강아지 똥'과 '몽실언니'의 작가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아름답고 감동스러운 동화 못지않게 그 삶에 향기를 품은 초인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삶은 비록 겉보기에 작고 초라했으나 속내는 한없이 크고 장엄하였습니다. 그는 진정 우리 시대의 작은 거인입니다.
선생의 한평생은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낯선 땅에서 남루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선생은 그 때를 일생에서 가장 따뜻한 나날로 기억합니다.
'1937년 9월에 나는 일본 도쿄 혼마치의 헌옷 장수집 뒷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함께 동무했던 아이들과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늘 외톨이로 골목길에서 지내야 했다. 삯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는 저녁때면 5전짜리 동전을 주면서 심부름을 시켰다. 이때 나는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유랑걸식 끝에 교회 문간방으로)
광복을 맞아 우리나라로 건너온 뒤 전쟁의 소용돌이를 거치며 신문배달원'서점 점원'재봉틀 수리공으로 떠돌던 선생은 열여덟 살 때 전신결핵이라는 큰 병을 얻습니다. 그 병은 평생을 두고 선생을 괴롭혔지만, 그는 그 아픔조차 받아들이고 어루만지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이 얼마나 깊었을지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오죽하면 '길 가다가도 퍼질러 앉으면/ 앉은 채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엉덩이/ 차라리 그대로 쑥쑥 빠져 들어가/ 천 길 만 길 지옥 속에라도 빠져들고 싶어라.'(결핵'1)하고 노래했을까요.
선생은 서른 살 무렵 경북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에 정착한 뒤로,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글쓰기에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 정성은 곧 '강아지 똥' '몽실언니' '무명저고리와 엄마' '사과나무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과 같은 100편이 넘는 동화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보석 같은 이야기들은 많은 아이들의 사랑을 받아, 지금 나이 서른 안쪽의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어릴 때 한 번쯤은 읽어 보았을 명작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선생은 천성이 인정 많고 눈물 많은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깊은 정성과 애정을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따뜻한 눈은 언제나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타계하기 달포 전에 병상에 누운 선생을 찾아갔을 때, 그는 불편한 몸으로 끊임없이 고향 마을 사람들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개는 요새 어머니가 없어서 고생하고 있고 아무개는 공부를 못 해서 기가 죽었다는 식으로, 아이들 이름을 하나 하나 들어 가며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듯 말했습니다.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한 할머니 이야기를 할 때, 선생은 슬픔에 겨워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어했습니다.
선생의 사랑이 미친 곳은 비단 사람뿐이 아니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생물, 이를테면 생쥐'벌레'절름발이 강아지 같은 것이 다 선생의 따뜻한 품안에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새마을 운동'으로 몸담고 있던 교회의 나무들이 마구 베어질 때, 선생이 어린 대추나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톱질을 멈추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다음과 같은 글을 읽다 보면 가슴이 저려 옵니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 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 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 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유랑걸식 끝에 교회 문간방으로)
이러한 생각이 '강아지똥'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낳았나 봅니다. 이 아름다운 동화는 하찮은 강아지똥도 쓸모가 있다는 걸 보여 줍니다. 못생기고 더러워서 버림받은 강아지똥은 깊은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봅니다.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다.'라는 흙의 말을 듣고 희망을 얻은 강아지똥은 스스로 잘게 부서져 거름이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별처럼 고운 민들레꽃을 피웁니다.
선생의 대표작 '몽실언니'에 나오는 인물들도 하나같이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들입니다. 모진 운명 속에서 절름발이가 되어 고통 받는 몽실, 가난에 찌든 아버지와 뒤틀린 새아버지,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겪는 밀양댁, 병약한 난남이와 꼽추 남편까지, 이들의 삶은 형벌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대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삶의 의지를 다지는 길로 이끕니다. 진정 사람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이 분단시대 한국문학의 가장 위대한 성과로 평가받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권정생 선생은 살아생전 말 그대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마흔 해 전 터를 잡은 조탑동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고, 시냇가에 자리 잡은 다섯 평 오두막은 언제나 그대로였습니다. 자신을 위해 돈과 품을 들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선생은, 오랫동안 집안에 그 흔한 냉장고 하나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보다 못한 이오덕 선생이 조그마한 헌 냉장고 하나를 구해다 반강제로 들여놓기 전까지 그는 해마다 매미소리와 산바람을 벗삼아 여름을 났습니다.
몇 해 전 한 방송사의 책읽기 프로그램에서 선생의 책 '우리들의 하느님'을 뽑아 크게 선전하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생은 한 마디로 사양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책 고르는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까닭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오래 전 선생이 '한국아동문학상'을 타게 됐을 때는 시상식에도 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천성이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보다 앞서 당선된 신춘문예 시상식에도 가지 않은 터였으니 이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이오덕 선생이 억지로 끌다시피 하여, 검정고무신을 신고 식장에 간 선생은 진심에서 우러난 연설로 모인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그때 선생의 옷차림이 오죽했으면 한 양복점 주인이 그에게 양복 한 벌을 선사하려고 했을까요. 선생이 그 제안을 사절하였음은 물론입니다.
선생은 말년에 자신의 글이 세상을 바꾸는 데 이바지하지 못했다며 괴로워한 적이 있습니다. 미움과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을 보며 선생의 절망감을 뼛속 깊이 이해합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마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아이들은 선생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 마음 속에는 조금씩, 정말 귀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가리는 슬기가 싹트고 있을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틀림없이 이 세상은 더 나아져, 모든 이들이 함께 어울려 행복을 누리게 되지 않을까요.
선생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마음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책 판매로 생기는 모든 인세는 아이들을 위해 써 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고,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기념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25년 동안 살았던 다섯 평 오두막조차 깨끗이 헐어서 자연으로 돌려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던 우리에게 권정생 선생은 그 갈 곳을 밝히는 등불이 돼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든든하던 스승 한 분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냥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곁에는 아이들이 있고, 그 아이들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권정생 선생이 뿌려 놓은 씨앗을, 이제 우리가 정성 들여 가꾸어야 합니다. 그 씨앗은 바로 희망이라는 이름의 씨앗입니다.
서정오(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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